한국사(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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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이봉창, 도쿄에서 폭탄을 던진 이유
이봉창의 집안 이봉창은 1901년 8월 경성에서 태어났다. 사업으로 부유했던 이봉창 집안은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보유한 집과 땅 대부분을 잃게 된다. 일제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인들은 가진 땅을 모두 신고해야 했는데, 신고 방법이 복잡해 땅을 포기하거나 일본인들에게 사기를 당하였다. 이봉창의 아버지도 토지 신고를 도와주겠다는 한 일본인을 믿고 집문서를 넘기는 바람에 모든 것을 잃고 산동네로 이사한다. 당시 15살이던 이봉창은 어려워진 집안 형편에 학업을 포기하고 생업에 뛰어든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과자점과 약국에서 일하며 이봉창은 탁월한 사교성과 뛰어난 일본어 실력으로 조선인이라 말하지 않으면 일본인처럼 보였다.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이봉창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
2024.02.09 -
가야의 왕족 출신 김유신, 신라의 영웅이 되다
김유신 가문의 역사 가야는 소국이 뭉쳐 만든 연맹 국가로 김유신 가문은 지금의 김해인 금관가야 출신이었다. 금관가야는 42년 김수로왕이 세웠으며 가야연맹의 초기 주도권을 장악하며 크게 성장하였는데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인 구해왕은 금관가야 제10대 왕이었다. 구해왕이 집권하던 6세기경 국경을 맞대고 있던 신라가 영토 확장을 위해 가야연맹을 공격해 왔고 이를 견디지 못한 구해왕은 백성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 신라에 항복한다. 신라의 법흥왕은 구해왕의 항복을 받아들이며 그와 가족들에게 신라 진골의 신분을 내린다. 신라의 신분제인 골품제는 골과 두품으로 혈통을 구분하여 골은 왕족, 두품은 일반 귀족 및 평민을 상징하였는데 구해왕은 법흥왕의 배려로 신라에서도 왕족 급에 해당되는 신분을 받으며 가야 왕족으로서 예우받..
2024.01.06 -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을 택한 이유
안중근의 집안 배경 안중근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무인 가문이었다. 안중근 역시 공부보단 말타기와 사냥에 능했으며 특히 사격 솜씨는 일품이었다고 한다. 1894년 16세에 황해도 양반 가문의 김아려와 혼인한 안중근은 그 해 조선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참전한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황해도 지방관리의 요청으로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섰고 아들인 안중근 또한 진압군으로서 전투에 참여했다. 그 시절 안중근은 동학농민운동을 반란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이 끝나고 농민군의 곡식을 군량미로 사용한 안태훈을 관료들이 반역죄로 몰아세우자 프랑스인 신부들이 거주하는 치외법권 지역인 성당으로 피신한다. 안태훈은 성당에 머물며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가족들에게 천주도 교리를 전파하며 안중근..
2023.12.24 -
독립군 대장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 역사
홍범도의 어린 시절 조선 말기 태어난 홍범도는 모친이 출산 후유증으로 7일 만에 사망하여 아버지가 젖동냥으로 키웠다. 홍범도가 9살이 되던 해 머슴이었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홍범도 역시 머슴살이로 생계를 이어간다. 어느 날 홍범도는 평양 관청에서 군인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머슴살이보단 군 생활이 낫다고 생각하여 15살 나이에 입대 최소 나이인 17세로 속여 군에 입대한다. 애국심보다 생계를 위한 입대였지만 그는 군대에서 사격과 제식 훈련에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한양의 파견 근무에 선발되기도 한다. 홍범도는 190cm의 남다른 신체 조건과 사격술을 가진 뛰어난 군인이었지만 장교들의 가혹 행위로 군 생활에 회의를 느낀다. 결국 홍범도는 병사들을 괴롭히던 장교를 때려눕히며 장교를 때린 하극상으로 처벌..
2023.12.24 -
을사오적 이완용 조선을 팔아먹은 방법
조선의 엘리트 이완용 이완용은 고종이 신임한 신하이자 조선의 인텔리 중의 인텔리였다. 병자호란 패배 이후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청나라를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고종은 미국과의 교류를 위해 육영공원을 세웠다. 인재 양성을 위한 육영공원은 명문가 자제와 현직 관리 중 선발된 30여 명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 이완용은 29살에 육영공원에 자원 입학하여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주미공사 관원 중 한 명으로 선발된다. 하지만 청나라가 주미 전권공사의 철수를 요구하자 고종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공석이 된 주미 전권공사의 자리는 이완용이 차지한다. 이완용은 미국에서 생활하며 영어 실력은 일취월장하였으며, 미국 공사관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조선으로 돌아온 이완용은 대미 ..
2023.12.16 -
일제강점기 일제가 조선말을 짓밟은 역사
일제가 가르친 국어 1930년 후반 학교에서는 조선말 사용이 금지되었고 실수라도 우리말을 쓰면 벌을 받고 따귀를 맞았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후 조선의 국어는 일본어가 되었으며 조선총독부가 펴낸 국어 교과서인 국어독본에는 일본어가 적혀있었다. 이때 우리 말과 글은 국어가 아닌 한글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는다. 세종대왕 이후 훈민정음으로 불리다 일제강점기 시절 처음으로 한글이라 불리게 된다. 말모이 : 첫 우리말 사전 한글이라 이름을 지은 사람은 국어학자 주시경으로 한글의 연구 아니라 교육을 통해 대중화에 힘쓰며 언어 독립을 꿈꿨다. 한글의 아버지인 주시경은 언제라도 우리말이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우리말 사전 제작을 계획한다. 1911년 조선어 사전 편찬을 계획한 주시..
2023.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