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2. 23:31ㆍ한국사
부여의 동명 신화
부여의 건국 신화인 동명 신화는 서기 60년 왕충이 쓴 <논형>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쪽 탁리국의 왕의 시녀가 임신하여 왕이 그녀를 죽이려 했다. 그러자 그녀는 "달걀 같은 기운이 하늘로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 아들이 태어나 왕은 아이를 죽이려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 말에 깔려 죽이려 했더니 말도 입김을 불어 죽지 않았다. 결국 왕은 어미에게 아이를 천하게 키우라고 하며 이름을 동명이라 지었다. 동명은 자라서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은 동명에게 나라를 뺏길까 두려워 다시 그를 죽이려 들었다. 동명이 이를 피해 남쪽으로 달아나며 엄호수에서 활로 강물을 내리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은 흩어져 다리가 없어져 추격병들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동명은 도읍을 정하고 부여의 왕이 되었다. 이 동명 신화는 후에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주몽 신화와 유사하다.
부여는 중국의 쑹화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국가로 기원전 2세기 무렵 등장하여 고구려에 흡수되기까지 대략 700년간 이어졌다. 부여가 건국되기 전, 지린시 근처에는 시퇀산이라는 청동기 문화를 가진 예맥이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194년 남쪽에서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며 고조선에 영향을 받던 예맥 사회에 변동이 생겼다. 예맥의 국가였던 고조선은 지배층 일부가 타지역 출신으로 교체되며 점점 예맥의 세력은 약화하였고, 이것은 지린시 지역에도 영향을 끼쳤다. 시퇀산 문화는 곧 소멸하고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부여가 건국된다.
부여의 정치, 사회의 모습
부여의 정치는 국왕이 중심이지만 지방은 '가'라고 불리던 귀족이 지배했다. 이 지배층은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우가·저가·구가·대사·대사자·사자라는 서열화된 호칭을 가지고 있었다. 왕과 함께 이 '가'들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층이었다. 부여는 수도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4개의 구역을 나눠 각 지역의 부족들이 연합한 연맹왕국의 형태였는데 이를 사출도, 5 부족 연맹이라 한다. 이 부족의 족장 이름은 마가·우가·구가·저가로 불렸고 그들은 다른 소규모의 부족들을 다스리는 부족장이었다.
부여는 순장이라는 지배자가 죽으면 신하도 같이 죽는 문화가 있었는데 '가'가 죽으면 함께 순장하는 숫자가 많을 때는 백 명이 넘었다고 한다. 각 읍락에는 호민이라 하는 지배층과 하호라고 하는 피지배층이 있었다. 호민은 본래 '가'계급에 속하는 지배자였는데 '가' 계급의 분화 과정에서 지배력을 잃어버리고 중간 계층으로 바뀐 이들을 말한다. 하호는 소농민이나 빈민들로 제가 계급에 곡식과 음식들을 바쳤다. 하호에 대한 갈취는 너무 가혹해서 노복처럼 비칠 정도였다. 하호는 밑에 노비를 둘 수 있었는데 이 노비들은 주로 살인자의 가족이나 전쟁의 포로였다고 한다. 부여는 형벌을 집행하는 감옥이 있었고 누군가를 살인하였을 경우 피의자를 처형하고 그의 가족을 노비로 삼았으며, 도둑질할 경우 12배로 되갚도록 했다. 형벌을 매우 엄하게 과하여 살인은 물론이고 음란하거나 투기한 부인은 사형에 처했으며, 가족이 이를 수습하려면 소나 말 등을 바쳐야 했다. 또한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취수혼 풍습이 있었고, 추수 감사의 성격을 지닌 제천행사인 영고를 행하며 이날에는 모여 먹고 춤추고 노래하며 죄수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1~2세기 번영을 누리던 부여는 3세기에 접어들어 큰 위기를 맞는다. 부여의 영향권이던 읍루 집단이 세력권에서 벗어나고 남쪽에는 고구려가 발전하기 시작한다. 부여는 이를 견제하며 중국 왕조와 협력하였는데 3세기경 고구려와 위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부여는 위 나라에 군량을 제공하며 협력했다. 이 전쟁으로 고구려는 수도가 함락되었지만, 곧바로 회복하며 부여는 더욱 고구려의 압박을 받게 된다.
3세기 후반에는 선비족 모용부가 부여를 급습하며 부여의 수도가 함락되고 국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부여의 지배층은 피신하고 많은 부여인이 중국에 노비로 팔려 간다. 서쪽으로는 선비족, 남쪽으로는 고구려의 위협을 받던 부여는 4세기에 이르러 지린시 일대를 고구려에 빼앗기며 중심지를 옮긴다. 이후에도 이어진 공격으로 부여의 왕과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며 위상을 점점 잃게 되자 끝내 버티지 못하고 동부여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고구려의 보호 속에서 왕실은 겨우 유지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독립국으로서 나라의 권위를 잃은 부여는 결국 왕이 고구려로 망명하며 소멸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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