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역사 '선사시대' 알아보기

2023. 5. 30. 17:08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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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한반도는 몇 만 년 전 지금의 한국·중국·일본이 하나의 대륙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땅은 처음부터 하나의 덩어리가 아닌 일부는 적도 부근에서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이동해 오며 형성된 것으로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약 1만 2천 년 전에 지금의 한반도 형태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때 빙하가 녹아서 상승한 해수면 높이가 100m 이상이라고 하니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는 언제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했을까? 우리나라 땅에는 인류의 기원을 추정할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고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도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지층은 대부분 생물을 쉽게 분해하는 흙이며, 위치가 북위 38도 선에 위치하여 추운 겨울을 가졌기 때문에 인류가 살았다면 불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 시기의 훨씬 이후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인류가 스스로 불을 지펴 사용하고 언어를 구사한 것이 60만 년 전. 그렇다면 한반도에서는 60만 년 전 이후의 구석기 유적이 인류의 최초 흔적일 것이다. 우리나라 구석기시대 유적은 1935년 함경북도에서 처음 발견되어 남한에서는 1964년 공주에서 발견되었다. 

 

구석기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구석기시대는 인류가 등장하고 난 후 가장 오랫동안 겪어온 시기이다. 인류가 살았던 시기를 100으로 봤을 때 구석기시대는 98.8 정도를 차지하는 긴 시간으로 그만큼 구석기인들의 발전 속도는 아주 더뎠다. 그들의 뇌는 현대 인류의 뇌와 비교했을 때 절반도 안 되는 크기로 도구를 향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들은 큰 돌에 부딪혀 깨진 돌조각을 주워 도구로 쓰면서 채집에 의존하여 생활했다. 그리고 약 60만 년 전부터 불을 사용하고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인류가 등장한 것은 약 300~400만 년 전으로 보고 있다).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가 많아지면서 생활에 큰 변화가 생겼고, 언어를 사용하며 떨어져 사는 종족들 사이에 문화와 경험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도구의 제작과 발전만은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그러다 10만 년 전 무렵부터 돌을 깨뜨려서 손질하기 시작한다. 돌을 날카롭게 다듬을 줄 알게 되며 석기들이 비교적 다양하게 제작되었고, 수렵이나 채집활동에 사용하며 실생활의 효율이 향상한다. 날카롭게 잘 다듬은 돌로 만든 무기로 생산량이 증가하자 동굴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시체를 매장하는 풍속도 생겨난다. 이 무렵을 중기 구석기시대로 구분한다. 이후 후기 구석기시대에는 뾰족한 끝을 가진 돌을 망치처럼 두드려 돌날을 가공했다. 모루떼기와 직접 떼기처럼 돌과 돌을 부딪치는 게 아닌 뾰족한 돌을 대고 망치처럼 내려쳐 날카롭게 만들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인류는 활을 발명하여 날쌔거나 몸집이 큰 동물도 사냥할 수 있게 되었다.

구석기와 신석기의 구분

신석기인은 식량을 기르기 시작한 인류라는 점에서 채집하여 먹고산 구석기인과 구별된다. 신석기인들은 강가나 해변에 살며 수렵이나 어로에 종사하면서 살았다. 신석기를 대표하는 토기인 빗살무늬토기의 바닥이 뾰족하거나 둥근 형태인 것은 토기를 땅에 쉽게 꽂아서 쓸 수 있는 약한 토질에서 살았음을 증명한다. 신석기인들은 점점 채집에서 벗어나 가축을 기르고 곡식을 재배하며 주거 형태도 해안에서 내륙으로 옮긴다. 이에 따라 빗살무늬토기도 땅에 놓기 위해 바닥이 점점 평평해졌다. 더 이상 구석기인처럼 먹고살기 위해 매일 사냥해야 했던 생활이 바뀌고, 식량을 저장할 수 있게 되면서 신석기인들은 혈연을 매개로 가족이 모여 살기 시작한다. 이들은 모여 살며 생산 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노동하고 얻은 생산물을 공평하게 분배하며 평등사회를 형성한다. 씨족장이 있었지만, 지배자는 아니었으며 지금의 가장과 같이 지도자일 뿐 계급이 없는 사회였다. 그리고 신석기인들은 특정 동물을 그들의 공동 조상으로 받들고 다른 집단과 자신을 구분했다. 조상으로 숭배된 동물을 토템이라 하고, 토템 숭배 사상을 토테미즘이라 한다. 우리나라 신석기인들의 토템은 곰과 호랑이였다. 또한 신석기인들은 자연물을 포함한 만물에 영혼이 있다는 것을 믿었으며, 자연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숭배하며 재난을 피하고 풍요를 기원했다. 주술사나 무당을 섬기며 믿는 샤머니즘이 나타났으며, 주술사를 칭하는 샤먼은 단순한 주술사가 아닌 중요한 일을 판단하고 실행하는 정치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청동의 등장

기원전 24세기를 전후하여 새로운 문화의 흐름이 일어난다. 도구의 재료를 유일하게 돌을 써왔던 데 반해 이 무렵부터는 청동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청동은 돌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흔한 소재가 아니라, 광석에서 구리와 주석을 제련해 내는 기술과 능력이 없으면 가질 수 없는 아주 귀하고 새로운 물질이었다. 그렇다면 인류는 금속의 존재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추측이지만 토기를 빚어 불에 구울 때 그 안에서 금속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인류가 처음 발견한 금속은 구리였는데 구리는 강도가 약해 쉽게 변형되어 도구로 쓸 수 없었다. 그러다 이들은 순동에 주석을 넣어 강도를 높인 합금을 만들어내고 이 청동을 재료로 도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청동은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주로 장신구나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청동기 시대에도 농기구는 석기였다. 반달 모양 돌칼이 청동기 시대에 들어와 새로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대부분의 농기구는 신석기시대의 것 그대로였다. 하지만 농법과 작물이 바뀌며 도끼와 쟁기 등을 만들어 농사에 사용했다. 또한 동물을 사육하며 그 힘을 농경에 이용하기도 했으며 고랑을 만드는 농법도 개발되었다. 쌀, 콩, 밀, 녹두 등 작물이 더욱 다양해지고, 개량되며 농업 생산력은 급격히 발전했고, 생산력의 발전은 청동기 사회를 더욱 촉진했다. 그렇지만 청동기 시대에 일어난 급격한 생산력의 발전은 무엇보다 청동제 무기로 인한 것이다. 전에 없던 강한 무기가 생산되며 사냥, 전쟁을 통해 청동기인들은 큰 잉여 가치를 얻게 된다. 신석기시대에도 부족 간의 전쟁은 있었고 지배-복속의 관계가 형성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는 패배한 집단은 청동기를 모두 약탈당하고 신석기시대의 생활로 전락하여 승리한 집단에 영구적으로 복속하게 되는 큰 굴욕을 봐야 했다. 승리자 집단은 패배한 집단의 청동까지 독점하고 그로 더 강력한 정복욕을 갖게 됨으로써 지역으로 힘을 펼치게 되고 이는 곧 국가의 건설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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