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의 나라 ‘고구려’의 역사

2023. 6. 5. 10:42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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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에서 탈출한 주몽은 부여의 지역에 고구려를 세웠다. 주몽은 졸본 부여로 가서 미망인이 된 졸본의 왕비인 소서노의 도움으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상류 유역의 지린성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이곳은 동서 교통의 요지로, 근처에는 평야와 몽골 초원이 있는 지리적인 이점으로 넓은 영토를 확장하는 데 유리하였다. 고구려의 종족 기원을 두고 부여족과 맥족으로 견해가 갈려있다고 한다. 랴오허강 동쪽의 주민을 예족으로 불렸는데, 고조선이나 부여도 이 예족에서 갈라져 나와 나라를 세운 것이다. 

 

 고조선이 연의 공격을 받아 요동 지역을 잃게 되며 청동기 문화는 비파형 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 바뀌는 등 중국의 철기 문화가 퍼지기 시작한다. 이런 정세는 근방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는데 압록강 중상류까지 영향을 미쳐 이 지역 주민 역시 철기 문화를 받아들여 농업을 발달시킨다. 이때 압록강 지역의 집단을 '구려'라고 불렀다. 고구려는 '구려'에서 유래되었는데, 고리국의 '고리'도 '구려'로 표기했고, 고구려를 '고려'라고도 표기했기에 결국 고구려는 '고려'와 '구려'를 합친 말이라고도 하고, 고을이나 성을 뜻하는 '구루'에 골짜기를 따라 마을을 이루었다고 해서 고구려가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주몽의 탄생과 고구려 설화

고구려의 개국 전설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광개토대왕릉비문> 등이 있으며 주몽의 설화는 개국 전설이 갖는 요소들을 고루 갖추었다. 햇빛을 받아 임신하여 낳은 알에서 태어난 주몽, 형제간의 갈등, 천제의 아들과 같은 내용이다. 

 

시조 동명성왕은 성이 고 씨고 이름은 주몽이다. 금와에게는 일곱의 아들이 있었는데 재주는 모두 주몽을 미치지 못했다. 맏아들 대소는 "그 사람됨이 용맹하여 후환이 두려우니 그를 없애버리십시오."라고 왕에게 청하자 주몽은 벗이 된 세 사람과 함께 도망친다. 엄호수에 이르러 강을 건너려 해도 다리가 없으니 주몽이 강에 말하길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이다. 내 뒤를 쫓는 자들이 다가오니 어쩌면 좋겠는가."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주어 주몽이 강을 건널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져 쫓아오던 자들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삼국사기>

 

옛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다.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생략)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 했다. 그 말에 응하여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 떼가 물 위로 떠 올랐다. 그런 후 강물을 건너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광개토대왕릉비문>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는데, 스스로 선조는 주몽이라 말한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로 부여 왕이 방에 가두었을 때, 햇빛이 비치어 몸을 돌려 피했으나 햇빛이 다시 따라와 비추더니 얼마 후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쯤 되었다. (생략) 부여 사람들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므로 다른 뜻을 품을 수 있으니 그를 없애버리자고 청했다. 주몽은 이에 부여를 버리고 동남으로 도망했다. 중도에서 큰 강을 하나 만났는데 주몽이 강에 고하길, "나는 해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라. 오늘 도망길에 추격하는 병사가 쫓아오니, 어찌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 그를 위해 다리를 만들어주었다. 주몽이 건너고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져 추격하던 기병들은 건너지 못했다. <위서>

 

고구려는 일찍 정복 활동을 펼쳤다. 동해안 방면에 풍부한 물적·인적 자원을 가지고 요동 동부 산간지대로 세력을 넓히는 한편, 선비족과 함께 요동 평원 일대를 공략하기도 했다. 2세기 후반에는 후한이 붕괴하며 고구려가 진출할 좋은 조건이 생겼다. 고구려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며 동방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3세기 후반에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국제 정세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서안평, 낙랑군, 대방군을 차례대로 점령하며 고조선 멸망 후 한반도에서 중국의 군현을 완전히 몰아내었다. 이로써 엘리트층을 확보하며 국가 발전의 틀을 다지고, 한반도 중남부에 관심을 가지며 직접 경계를 맞대고 교섭하기 시작했다. 소수림왕 시기에는 국가체제 재정비를 위해 불교를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했으며, 태학을 설립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불교 수용은 승려·불상·불경을 받아들이고 외국 승려인 순도와 아도를 들이게 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사상과 신항을 통합하고 불교와 함께 종교의례나 생활양식도 바뀌었다. 이때 건축이나 공예에도 불교가 많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태학은 중앙집권체제를 갖춰가며 행정조직이 확대됨에 따라 태학을 통해 소양과 능력을 갖춘 관원을 양성하기 위함이었으며, 율령은 국가체제 운영의 기본이 되는 틀로 율은 죄의 형법, 영은 일반 행정규정을 말한다. 그전에 법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때 국가 전체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법을 재정비해 공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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