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가 고려의 역적된 이유

2023. 6. 5. 15:00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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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현재 채널 tnN에서 방영 중인<벌거벗은 한국사>의 1회 '이성계는 왜 고려의 역적이 되었나'의 내용을 정리해 보려 합니다.  

벌거벗은 한국사는 2022년 4월부터 시작하여 현재 수요일 오후 8시 20분에 방영되고 있는데요. 큰별쌤으로 알려진 EBSi 한국사 강사 최태성 님과 김동현, 조나단, 장예원 패널분들이 등장하며 한국사를 흥미롭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책으로 읽는 것보다 감정이 느껴지는 음성과 시각 자료와 함께 보니 더욱 한국사를 쉽게 배우고 이해할 수 있는데요. 좋은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한국사에 대해 더 알아가는 기회가 되셨으면 합니다. 벌거벗은 한국사 1회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국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이성계는 고려 멸망의 원인?

이성계는 고려가 아닌 1335년 원나라에서 태어났다. 1231년 몽골 제국과 오랜 전쟁을 치르던 고려는 몽골 제국에 영토를 계속해서 빼앗기게 되는데 이성계는 당시 몽골 제국에 빼앗긴 동북면에서 태어난다. 지금의 전주 출신이던 이성계 가문이 북쪽으로 간 까닭은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에 거슬러 올라간다. 이안사는 당시 전주 지방 관리와 다툼을 벌여 이를 피해 삼척으로 거주를 옮겼는데, 공교롭게 그 전주 지방 관리가 강원도 지역으로 부임한다고 하여 이를 피해 또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동북면으로 피하게 된다. 이후 고려는 동북면을 몽골 제국에 빼앗기고 몽골 제국이 원나라로 개명하면서 이안사는 원나라의 관리가 되었다.

*원나라 : 1271~1368년 약 1세기 동안 동아시아 대부분을 지배한 몽골족의 왕국

벌거벗은 세계사 1회

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은 고려를 자주 국가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공민왕은 빼앗긴 동북면을 되찾기 위해 쌍성총관부 탈환을 위하여 북벌을 감행하는데 이때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이 참여한다. 빼앗긴 지 100여 년 만에 고려는 동북면 땅을 되찾으며 이성계의 가문은 고려로 돌아오게 된다.

*쌍성총관부 : 원나라가 고려 땅인 동북면에 설치한 통치 기구

 

이성계 가문은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사병 집단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가별초'라 하며, 규모는 무려 1천~3천 명이었다. 이성계는 이 가별초를 이끌며 동북면 지역의 국경을 지켰는데 원나라의 반란군 홍건적이 정치적으로 혼란한 틈을 타 반원 운동을 일으켜 군을 피해 도망치다 1359년 고려를 침공한다. 고려의 수도 개경이 20만 홍건적에게 함락되며 이들은 고려의 백성에게 온갖 잔악한 짓을 행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가별초와 함께 개경으로 진격한 이성계는 홍건적의 총사령관을 사살하며 개경을 3개월 만에 탈환한다. 홍건적 토벌로 고려 사회에 이름을 알린 이성계는 중앙 정계로 진출을 꿈꾼다. 그런데 고려의 최상위 계층인 권문세족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성계의 정계 진출을 반대한다. 당시 권문세족은 불법적으로 토지를 강탈하고 독점하며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렸는데, 공민왕과 함께 권문세족에 맞설 개혁 세력인 신진사대부가 등장한다. 신진사대부는 고려 말 성리학을 공부한 유학자들로 핵심 인물은 정몽주와 정도전이다.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명나라가 세력을 확장하던 원명 교체기가 되자 공민왕은 지금이 친원파 권문세족을 청산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로 1374년 9월 공민왕이 암살되고 10살 우왕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며 권문세족의 일인자인 이인임이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권문세족 : 벼슬이 높고 권세가 있는 정치 세력이자 지배 세력

 

고려 말 왜구가 500척의 배로 고려를 침공하여 왜구를 저지하기 위해 이성계는 황산 전투를 벌인다. 황산 전투는 고려 역사상 왜구와 벌인 최대 규모의 전투로 이를 통해 이성계는 고려의 영웅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정도전은 가별초를 이끄는 이성계의 통솔력과 지배력을 보며 "이런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라고 이성계와 정몽주, 정도전은 교류하며 서로 정치를 논하기 시작한다. 한편 이인임의 최측근인 염흥방의 노비가 조반이라는 사람의 땅을 빼앗고 매질을 한 사건이 일어난다. 조반은 그 노비를 죽이고 자수하며 권문세족의 횡포를 고발하는데 권문세족의 횡포를 더 이상 참지 못한 우왕은 염흥방과 가족들을 참수하라 명한다. 이 사건에 연루된 권문세족의 재산은 몰수되고 친인척과 노비까지 약 1000여 명이 처형되었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염흥방뿐만 아니라 이인임도 처형하라고 주장했는데 이인임은 최영의 도움으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이인임은 최영에게 이성계가 나라의 임금이 될 것이라 경고했는데 처영은 이를 쓸데없는 소리라며 넘겼다. 이인임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명나라는 고려에 과거 원나라의 영토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한다. 우왕과 최영은 이 소식을 듣고 명나라를 꺾고 고구려의 옛 영토를 찾자는 요동 정벌을 주장한다. 정몽주는 친명파로 요동 정벌을 반대하며 외교적 해결을 주장하였지만,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반대하는 문신을 죽이며 강력히 반대했다. 이성계는 사불가론이라고 하는 네 가지 이유를 내세워 요동 정벌을 반대한다. 우왕은 이를 듣고 수긍했으나 다음 날 말을 바꿔 결국 요동 정벌을 행할 것을 명한다. 이성계는 결국 요동 정벌을 위해 압록강 근방 위화도까지 북진했으나 장마철에 불어난 강물과 악조건으로 이성계는 군의 상황을 알리고 또다시 사불가론을 써서 최영에게 편지를 보낸다. 위도화에 있자니 병력 손실이 걱정되고 돌아가면 역적이 되니 이성계는 고민이 많았지만 결국 요동 정벌을 포기하고 임금 측근의 악인을 제거하여 백성을 편하게 하자고 하며 지휘관들을 이끈다. 1388년 5월 22일 이성계의 군단은 회군하여 개경으로 돌아온다. 최영은 유배지에서 처형되고 이성계는 고려의 군사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성계는 수탈한 토지를 돌려주고 억울한 노비들을 해방했으며, 권문세족으로 떠났던 민심을 되찾았다. 그렇게 1393년 2월 15일 옛 조선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의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

 

이성계의 -사불가론-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하다. 둘째, 농번기인 여름철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하다. 셋째, 군대가 북쪽으로 가면 남쪽의 왜구가 공격할 수 있어 불가하다. 넷째, 곧 장마철이라 활의 아교가 높으며 전염병을 앓게 될 수 있으니 불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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