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동, 정말 그녀는 죽을 죄를 지었나

2023. 6. 8. 16:10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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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이미지로 각인된 어우동, 사실 양반집 딸이었다?

어우동은 한양의 지체 높은 양반집. 즉, *공신 집안이자 승문원지사(현 외교부 장관)인 박윤창의 딸로 태어난다. 어우동의 본명은 '박구마'로 추측되는데, 당시 조선시대는 여성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별명처럼 그녀를 어우동이라 불렀다. 어우동의 뜻은 '같이 어울려 통하다'의 의미이다.

*공신 : 나라를 위하여 특별한 공을 세운 신하

 

어우동의 용모는 <용재총화>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성의 외모를 기록으로 많이 남기지 않은 조선에서 직설적인 '아리따웠다'라는 표현을 쓴 걸로 보아 어우동은 상당한 미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돈, 명예, 미모를 다 갖춘 어우동은 혼기가 차자 조선의 왕가와 혼담이 오가며 왕의 현손인 태종 이방원의 증손자, 태강수 이동과 혼인한다. 왕의 현손인 4대손까지는 왕의 종친에 속하여 당시 법으로 관직을 얻지 못했지만, 나라로부터 품위 유지비인 토지와 녹봉을 받았으며, 왕의 혈족이었기에 종친으로서 위상과 권한을 누릴 수 있는 지위를 가졌다. 어우동은 왕의 종친과 결혼했기 때문에, 오늘날 3급 공무원 격인 '정 4품 혜인' 작위를 받았고,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도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태강수 이동은 어우동과 못 살겠다고 그녀를 쫓아내 버린다.

어우동은 바람을 피워 남편에게 쫓겨났다?

남편 태강수 이동은 어우동의 불륜 현상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이동이 집에 들인 은그릇을 만드는 은장과 바람이나, 남편이 나가고 나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장인 옆에 앉아서 그릇 만드는 정묘한 솜씨를 칭찬하기도 하며 내실로 끌어들여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몰래 숨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이것은 성현의 <용재총화>에 적힌 태강수 이동의 주장인데, 이와 반대로 <조선왕조실록>에는 태강수 이동이 기녀 연경비를 매우 사랑하여 그 아내 박 씨를 버렸다고 설명한다.

 

종부시는 태강수 이동처럼 기생에 빠져 아내를 버리는 일이 많아지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성종에게 이 문제를 고하였다. 왕에게 이런 사생활까지 보고된 이유는 성종은 조선을 유교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왕이었으며, 양반 이상의 신분은 왕의 허락이 있어야 이혼할 수 있었고, 가족이 평안해야 나라가 평안하다고 말하며 이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성종은 정실부인인 어우동을 쫓아낸 태강수의 작위를 빼앗고 재결합 명을 내린다. 어명을 받은 태강수 이동은 어명을 어기고 어우동을 내쫓은 것을 번복하지 않았는데 어명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태광수 이동은 3개월 후 작위를 돌려받는다.

*종부시 :조선 시대 왕실의 족보를 편찬하고 왕실 종친의 허물을 감찰하던 기관

 

조선 시대에는 남편 없이 여자 혼자 경제적 자립이 힘들었기에 결국 어우동은 친정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어우동의 어머니인 정귀덕은 조선 팔도에 소문난 악처였다. 아버지인 박윤창은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었는데, 정귀덕은 살림살이를 때려 부수며 결국 어우동의 부모님은 이혼한다. 남편에게 내쫓기고 부모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어우동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어우동의 여종은 오종년이라는 자와 만남을 제안한다. 어우동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앞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오종년과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다 어우동은 또 다른 왕가의 남자를 만나게 된다. 길을 가던 중 어우동에게 첫눈에 반한 남자는 방산수 이난이었다. 그는 태강수 이동의 6촌 형제 관계로, 당시 집안의 상이 있을 때 상복을 같이 입을 정도로 가까운 친척이었다. 어우동은 태강수 이동과 이혼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불륜과 근친상간으로 논란이 될 왕실 스캔들이었으나, 둘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어우동은 이난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 팔뚝에 이난의 이름을 문신까지 한다. 유교를 숭상한 조선은 몸에 상처를 내지 않는 게 원칙인데 유교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문신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조선 시대에 문신은 형벌로써 얼굴에 죄인임을 알리기 위해 사용하였지만, 당시 연인끼리 문신으로 서약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우동은 이난 이후에도 다른 남자들과 만나며 이름을 몸에 하나씩 새겼다. 어우동이 이렇게 남자를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신분을 속였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여성상은 남편만 섬기는 게 보통이었으며, 왕가의 며느리나 양반의 신분이라면 특히 더욱 엄하게 생각했기에 내금위의 첩, 기생으로 신분을 속이며 어우동은 여러 신분의 남자들을 만나게 된다. 

벌거벗은 한국사 3화, 어우동이 만난 왕가의 남자들

한양에는 어우동의 자유로운 연애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결국 어우동은 의금부로 끌려가게 된다. 의금부로 끌려간 어우동의 죄목은 방산수 이난과의 불륜 및 근친상간. 어우동은 묵비권을 행사하며 자신이 아직 종친의 아내로 기록되어 있으니 신분상 곧 풀려날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결국 만났던 남자들의 정체를 모두 공개해 버린다. 어우동이 실토한 이유는 감옥에서 만난 이난의 조언 때문이었는데, 예전에 간통했던 감동이란 양반 여인이 자백하여 형을 피했던 선례가 있었다. 양반 여성의 간통은 장형으로 다스린 뒤 관비로 만들거나 유배를 보냈는데, 유감동은 장을 맞은 후 관비로 보내졌지만 이후 신분을 되찾고 유배를 떠났다. 어우동이 이를 듣고 자신도 감형이 될 것이라 기대하며 모든 것을 자백한 것이다. 그러나 유감동 사건 당시의 왕은 세종이었는데 세종이 유감동을 극형에 처하지 않은 이유는 양반이라고 더 강화된 법을 적용하지 않고 일반 간통 사건으로 정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종은 세종과 다르게 유교 질서의 성립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보였고 결국 어우동은 교부대시에 처한다. 교부대시란 참형이나 교형은 형이 확정되면 춘분 전에 집행하는 것이 원칙인데, 부대시는 이때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집행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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