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7. 14:22ㆍ한국사
벌거벗은 한국사 2회 '연산군은 왜 미치광이가 되었나'의 내용입니다. 2회에서는 총신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인 조선 정치사 전문가 송웅섭 교수와 정신건강의학과 노규식 박사가 함께 나오셨습니다.
아들이 어머니의 살로 젓갈을 만들다?
연산군은 성종과 중전 윤 씨 사이에 적장자로 태어난. 1479년 중전 윤 씨의 생일, 성종이 윤 씨가 아닌 다른 후궁의 처소로 가자 분노한 윤 씨는 성종과 다투던 중 용안에 상처를 내어 궁에서 쫓겨난다. 윤 씨는 사실 이전에 폐비 논의가 한 번 있었는데 윤 씨의 처소에서 비상(독약)과 방양서(저주를 담은 주술서)가 발견된 점, 그리고 기존에 인격 장애와 같은 성격 문제가 있어 결국 선을 넘은 행위로 폐위를 확정한다. 윤 씨가 궁에서 쫓겨난 지 3년 후, 성종은 폐비 윤 씨에게 사약을 내리고 연산군은 7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는다. 연산군은 성종과 중전 윤 씨 사이에 적장자로 태어났지만, 성종은 윤 씨의 죽음을 연산군에게 비밀로 하여,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정현왕후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라게 된다.
*적장자 : 정실부인이 낳은 맏아들
그럼 연산군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연산군의 출생으로 기뻐했던 성종은 연산군이 자라며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그에 관한 일화는, 성종이 연산군과 함께 궁을 거닐던 중 다가온 성종의 사슴이 연산군의 손을 핥자 사슴을 발로 차버리거나, 할머니인 소혜왕후에게 술을 올리는 자리에 궁녀가 연산군을 데리러 가니 연산군은 "가서 내가 아프다고 얘기하지 않으면 나중에 너 죽는다"라고 궁녀를 협박했다고 한다.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아 걱정이 많았던 성종은 서연관들에게 연산군의 보충 수업을 지시하였는데 그러던 중 1494년 성종이 갑작스레 사망하게 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살에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그날 자기 손을 핥았던 사슴을 죽이는 돌발행동을 한다. 이는 아버지가 아꼈던 사슴을 죽이며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분노의 표현이자, 자신이 원한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은 질투의 대상에 대한 복수였다.
*서연관 : 조선 시대 왕세자들의 교육을 담당했던 관리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셌다. 성종이 죽은 다음 날부터 연산군은 삼사와 기 싸움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 첫 번째 안건은 수륙재였다. 수륙재는 선왕을 추모하는 목적으로 장수와 명복을 비는 불교식 제례인데, 연산군이 관례대로 성종의 수륙재를 지내려고 하자, 삼사가 성종은 유교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 왕이었기에 불교식 제례는 맞지 않다고 반기를 들었다. 왕과 삼사의 대립은 성종 때부터 커지고 있었는데 연산군도 수륙재 문제로 삼사와의 갈등이 깊어지자 연산군은 자신에게 사사건건 간섭하는 삼사에 점점 분노가 쌓이기 시작한다. 결국 연산군 즉위 4년 후, 강한 왕권을 위해 제 뜻을 반대하는 신하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무오사화의 시작이 된다.
*삼사 : 언론 기능을 한 세 기관
홍문관(경연을 주최하고 정치를 연구하는 연구 기관), 사간원(왕과 신하의 잘못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기관), 사헌부(관리 감찰 기관)
무오사화란
무오사화는 '무오년(1498년)에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이란 뜻으로 조선 최초의 사화이다. 무오사화의 원인은 사초인데, 사초는 왕이 죽게 되면 그 행적들을 정리한 실록을 편찬하게 되는데 그 실록의 기본이 되는 자료를 뜻한다. 문제가 된 사초의 내용은 '세조가 자신의 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였던 의경 세자의 후궁 권 씨를 불러들였지만, 분부를 따르지 않았다. 세조가 조카였던 단종의 어머니이자 자기 형 문종의 아내였던 현덕왕후의 관을 무덤에서 파내 바다에 버렸다. 단종의 시체가 함부로 버려져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 쪼았고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였는데 연산군은 자신의 증조할아버지인 세조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에 화를 내며 이 기록을 쓴 김일손을 잡아들이라고 명한다. 그리고 유자광은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의 글 '조의제문'을 연산군에 구절마다 풀이해 주며, 이가 세조를 모욕하는 내용이라 설명하며 연산군에게 이들을 붕당조성죄로 처벌을 요청한다. 붕당은 정치적인 입장이나 학맥에 따라 모인 집단으로 이 붕당을 조성했을 시 본인은 사형, 가족들은 노비로 만들고 재산을 몰수하는 중범죄였다. 붕당조성죄 처벌을 받아들인 연산군은 김종직이 이미 병으로 사망했다 하자 그는 *부관참시하였고, 김일손은 능지처사하였으며, 관련된 50여 명의 신하가 사형, 유배, 파직되며 무오사화는 끝나게 된다.
*부관참시 :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자르는 형벌
무오사화를 계기로 권력을 얻은 연산군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권력을 남용한다. 연산군은 금표를 세워 그 안에 주현과 군읍을 폐지한 다음 수백 리를 풀밭으로 만들어 금수를 기르는 마당으로 삼았고, 여기에 들어가는 자는 목을 베었다. 무오사화 이후 위축된 신하들은 연산군의 사치에 반발하기 시작한다. 삼정승은 연산군이 저지른 폐단과 실정을 10가지의 항목(시폐 10조)으로 비판하며 삼사와 연산군의 대립이 시작된다. 그렇게 무오사화 6년 후, 1504년 갑자사화가 발발하게 된다.
*삼정승 : 의정부의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말하는 국정을 통괄하던 최고위 관리
1504년 3월 19일 연산군은 임숭재(임사홍의 아들)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이때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 씨의 죽음의 전모를 밝히기 시작한다.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인 엄 씨와 정 씨가 폐비 윤 씨를 중상모략하여 그 계략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듣자 바로 궁궐로 가 엄 씨와 정 씨를 처형하고 그 시체 일부를 소금에 절여 젓의 형태로 만들었다고 한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사실 폐비 윤 씨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연산군 즉위 1년, 성종의 묘지문에 적힌 '윤기견'이라는 이름을 보고 그가 폐비 윤 씨의 아버지임을 알게 되었지만, 자세한 죽음의 내막을 몰랐기에 갑자사화에 이르러 분노가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약 7개월에 걸쳐 폐비 윤 씨의 죽음에 관련된 이들을 숙청하였는데 그 피해자만 무려 200여 명이었다. 점점 미치광이가 되어 가는 연산군은 신하들에게 무시무시한 선전포고를 하는데, 이렇게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누구든 처벌하겠다는 공포정치의 서막을 연다. 연산군은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잔악한 형벌을 가하는데, 죽은 자를 또 죽이는 형벌인 쇄골표풍(죽은 자의 묘비를 부수고 유골을 파헤쳐서 가루로 만든 다음 바람에 날려 보낸다)을 행한다. 당시 조선의 가치관은 조상을 잘 섬기는 것을 핵심 가치로 여겼기에 이는 상상 하기도 힘든 잔혹한 형벌이었다.
연산군은 술과 여자에 빠져 궁궐을 자신의 향락의 장으로 만들었고, 경복궁 경회루에서 연회가 끊이지 않았으며 연못에선 기생들과 뱃놀이를 즐겼다. 연산군은 흥청이라고 하는 당시 기생(운평) 중 최고의 운평에게 재물과 노비를 내리고, 그들의 부모들을 한양으로 불러 집과 땅을 하사하였다. 연산군 10년 운평과 흥청의 수는 1,000명이었는데 이후에는 10,000명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운평과 흥청을 늘리기 위해 채홍사라는 새로운 관직까지 만들고 여기에 임사홍과 임숭재가 임명되자 그들은 백성들의 아내와 딸, 양반의 첩까지도 마구잡이로 끌고 간다. 임숭재는 심지어 연산군의 신임을 얻기 위해 이미 시집 간 자기 여동생까지 연산군의 침소에 들게 한다.
*채홍사 : 전국의 미녀를 뽑아오기 위한 관직
주색에 빠져 무자비하게 권력을 휘두르며 조선의 성리학 이념까지 뒤엎은 연산군과 숨죽이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신하들은, 인내심 끝에 드디어 마지막 패를 꺼내 든다. 연산군 12년 9월, 신하들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계획한다. 중종반정은 조선 최초의 반정으로 거사하기 하루 전날 마사와 건장한 장수들이 호응하여 운집하였고, 군민 등이 소문을 듣고 분주히 나와 거리와 길을 메웠다고 한다. 반정을 일으키는 신하들과 군대를 도와준 조력자는 무오사화의 핵심 인물인 유자광이었다. 한때 연산군의 최측근이었던 유자광이지만 연산군은 간신들에게마저 배신당하는 임금이 된 것이다. 반정군에 의해 연산군은 왕위를 내려놓고, 임금의 옥새를 확보한 반정 세력은 중종을 새로운 왕으로 세운다. 이 중종반정에 성공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하루가 채 되지 않았다.
중종반정을 통해 폐위된 연산군은 강화군 교동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유배 2개월 만에 전염병으로 사망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현재 서울 도봉구에 연산군의 묘가 있는데 왕의 묘는 '릉'이라 불렀지만, 연산군은 대군이기에 '묘'로 불렀다. 왕릉과 달리 왕의 예우를 위한 구조물도 없는 모습이다. 연산군은 반면교사(되풀이해서는 안 될 나쁜 본보기)로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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