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수재는 왜 성균관에 모였나

2023. 6. 26. 14:37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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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은 成 이룰 성, 均 고를 균, 館 집 관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하는 기관이란 뜻이다. 조선의 내로라하는 수재들 대부분이 성균관 출신이며, 이황은 성균관의 대사성(총장)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렇다면 성균관에서는 무엇을 배웠을까?

조선의 수재들은 성균관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성균관은 유학을 가르치는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유학의 상징인 공자의 사상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교육기관인 동시에 제사를 지냈던 사당이다.

*공자 : 세계 4대 성인이자 유교의 창시자로 인과 예를 강조.

왕세자입학도

왕세자입학도는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식 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비록 왕세자의 모습을 그릴 수 없어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스승은 책상 위에 책을 놓고 왕세자는 바닥에 책을 놓고 앉는 모습으로 비록 왕세자일지라도 성균관에서는 제자로서 스승에게 예를 갖췄다고 한다.

 

성균관의 입학전형 중 대표적인 것은 과거시험이었는데, 현재의 수능처럼 이뤄진 소과의 진사시 또는 생원시를 통과한 200명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현 공무원 시험 격인 대과를 통해 고위 관료로 진출하였다.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면 음식과 숙박 시설이 무상으로 제공되었고, 유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는 반인이 배정되었다. 또한 성균관 유생들은 과시라는 특별시험을 응시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성균관 유생들에게만 제공되는 특별 기회로 합격 시 고위 관료가 될 수 있었다. 일반 응시자보다 성균관 유생이 된다면 고위 관료로의 진출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성균관에 입학하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신분 상승을 위한 단 하나뿐인 기회였다.

*반인 :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로 유생들을 보조하는 역할

 

그러나 이런 지식인들이 모인 성균관 생활은 혹독했다. 성균관에는 신방례라고 하는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는데 선배들이 주도하여 신입 유생의 집에 찾아가 잔치를 벌였다. 가난한 성균관 유생은 형편상 이를 감당하지 못해 성균관 입학을 포기한 유생도 있었다. 이는 조정에서도 인지할 정도로 큰 악행이었는데 그렇다고 이를 막지는 못했다. 또한, 율곡 이이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죽은 후 1년 동안 절에 들어가 수양한 것 때문에 성균관에서 놀림을 받았다. 숭유억불이라 하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한다'는 사상 때문에 한때 불교에 빠졌던 율곡 이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성균관에 입학하면 대성전에 들러 공자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려야 하는데 장의(민복)가 율곡 이이를 불러 '중'이라고 흠을 잡으며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날이 저물도록 실랑이가 이어져 결국 율곡 이이는 공자에게 예를 갖추지 못했다고 한다.  

*장의 :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기구인 재회에서 선출된 유생들의 대표

 

혹독한 신방례를 겪은 성균관 유생들의 이후 생활도 순탄하지 않았다. 아침 첫 번째 북소리로 깨어난 성균관 유생들은 몸가짐을 바르게 한 후 두 번째 북소리에 새벽 공부를 시작한다. 세 번째 북소리에는 식당으로 향하는데 밥 먹기 전 식당 앞 필수 코스는 출석 체크였다. 아침, 저녁 하루 두 번을 출석해야 원점 1점이 부여되었는데 총 300점을 채워야 특별 시험인 관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성균관은 자기 주도 학습으로 자신이 공부해 온 부분을 설명하고 선생님과 토론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였는데 또한 시험은 일강(매일), 순제(열흘), 월강(월말), 절일제(1,3,7,9월)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시험 결과는 연말에 합산하여 성격이 우수한 자는 추천을 받아 하급 관리로 임명되거나 대과 급제에 해당하는 혜택을 부여받기도 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이런 혹독한 일정에 시름시름 앓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는데 성균관 끝에는 약방을 두어 유생들의 건강을 관리할 정도였다.

 

성균관 유생들의 최종 목표는 고위 관료가 돼 자기 뜻을 펼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입학 후 관료가 되기 위한 시험인 대과는 초시, 회시, 전시의 총 세 번의 관문을 넘어야 했다. 이 시험은 3년에 한 번 치러졌는데 합격자는 33명뿐이었다. 이 시험의 경쟁률은 11,000:1로 알려져 있는데 1800년 정조가 주최한 특별 대과 시험에서 110,000명의 응시자 중 합격자는 단 10명이었다고 한다. 

 

이 과거 시험은 난이도가 상당하였다. 성균관의 자랑이었던 퇴계 이황은 과거에 28세에 소과 시험에 합격하고 34세 대과 시험에 합격했는데 세 번 연속으로 낙방했다고 한다. 그만큼 어려운 시험이었고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이렇게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매달린 이유는 그 당시에는 과거 시험 외에는 출세할 방법이 없었다. 과거 합격에 목숨을 건 유생들은 결국 부정행위까지 저지른다. 커닝페이퍼를 적어오거나 담장 밖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노끈으로 답을 전달받기도 했으며 이를 들킬 경우에는 금품으로 시험관을 매수했다. 조선 시대 과거 시험장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고 한다. '난장판'의 유래가 과거 시험장에서 선비들이 뒤엉켜 뒤죽박죽 난장이 됐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결국 숙종 때 최악의 입시 스캔들이 벌어진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이들이 모두 의금부로 끌려가 조사받게 되는데 그 시작은 시험관의 상소였다. 이번 과거 시험에 부정행위가 있다는 소문이 있으니 모두 조사해 달라는 말을 들은 숙종은 대대적인 전면 조사를 지시하였다. 당시 과거 시험지에는 이름을 쓰지 않았는데 합격자의 답안으로 바꿔치기하거나 감독관이 답안을 고쳐주고, 미리 답안에 작성자를 표시해 두어 합격시키기도 하는 부정의 품앗이가 일어난 것이다. 수험생의 일이 아닌 고위 관료와 시험 감독관까지 얽힌 조직적인 부정 시험 사건이었다. 왕의 신하를 뽑는 시험에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분노한 숙종은 결국 시험을 전면무효 시키고 연루된 50여 명을 파직, 유배, 군대까지 보낸다. 이런 처벌 내용을 들은 신하들은 왕의 처벌에 반대하며 다시는 이런 일어나지 않게 과거 시험 부정행위를 반역 행위로 보자고 청한다.

 

과거 시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전란을 겪고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을 소생시키는 것이 지금 당장 시급한 일이다. 지금 당장 시급하게 힘써야 할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 광해군 3년 문제

이 문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황폐해진 조선을 수습하던 광해군의 고민이 담긴 문제였다. 과거 문제를 보면 그 시대의 고민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응시자들의 현안에 대한 식견을 갖췄는지를 평가하고, 시대적 현안을 이론적 근거로 답안을 작성을 해야 하기에 이론적 지식은 기본이고 판단력까지 갖춘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였다.

 

성균관이 최고 교육기관으로 인정받은 이유는 시대의 정신을 묻는 책문과 그에 대한 대책, 자신의 이익보다 이익을 더 예민하게 생각하고 시대정신 앞에 늘 깨어있었던 조선의 미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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