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12. 17:11ㆍ한국사
통일 신라 시대 이후 900년 무렵, 통일 신라는 세 나라로 나눠지며 후백제, 신라, 태봉(후고구려)의 후삼국 시대가 열린다. 그중 궁예는 태봉을 건국했는데, 그는 자신을 미륵이라 칭했으며, 상대의 마음을 읽는 '관심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파죽지세로 주변국을 점령하며 후삼국 시대에 가장 많은 영토를 차지했던 궁예는 가장 믿었던 부하인 왕건에게 쫓겨나는데, 그는 왜 역사에 폭군으로 남아있으며 왕건에게 쫓겨나게 되었을까?
궁예는 누구인가
궁예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다. 후궁의 아들이었던 궁예는 신라의 왕자였지만, 궁궐 밖 어머니의 집에서 태어났다. 이 출생 소식을 들은 궁궐의 일관은 궁예의 탄생을 풀이해 보는데, 탄생일로 보아 불길한 운을 타고난 아이로 나라에 해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 이유는 궁예는 5월 5일생으로, 숫자 5는 양수를 의미하는데 양과 양이 겹친 양기가 센 날에 아이가 태어나면 불길하다는 사상이 중국으로부터 전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게 궁에서는 사람을 보내 궁예를 없애버리려 지붕 위로 던져버렸는데 이를 유모가 받아내어 다행히 목숨은 구했지만, 손에 눈이 찔리며 한쪽 눈을 잃게 된다. 궁예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유모는 궁예를 데리고 도망쳐 왕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자기 아들처럼 키운다. 그렇게 10여 년 후, 어려서 장난기가 많던 궁예를 참지 못한 유모는 울면서 궁예에게 출신의 비밀을 털어놓게 된다. 출생의 비밀을 들은 10살 궁예는 출가를 결심하고 집을 떠나 절로 향한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나는 이를 두고 보지 못하고 오늘까지 몰래 너를 키웠다. 그렇게 경망스럽게 행동하다가는 반드시 남들에게 알려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죽을 수도 있다."
집을 떠난 궁예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선종이라는 법명을 지어 절에서 지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궁예가 발우를 들고 식사하러 가던 중 까마귀 하나가 궁예의 머리로 날아들어 무언가를 발우에 떨어뜨린다. 그것은 첨대였는데 거기에는 '王'이라 적혀있었다고 한다. 궁예는 이것을 하늘의 뜻이라 받아들여 절을 떠나 정계로의 진출을 마음먹는다. 당시 통일 신라 말기에는 왕실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고를 바닥내고, 귀족들 사이에는 금입택(금을 입혀 만든 진골 귀족의 호화 저택)이 유행하거나 노비를 3천 명을 거느리는 등 혼란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들은 궁예가 정치적 포부를 펼치겠다는 기폭제가 되었다.
*첨대 : 점괘를 적어둔 뒤 이를 뽑아 길흉을 판단하던 대나무 조각
궁예는 절을 나와 힘을 키우기 위해 호족을 찾아간다. 당시 호족은 경제력과 군사력, 백성들의 민심까지 가진 실질적인 지배 세력이었다. 궁예는 호적 중에서도 원주 지방의 대호적인 양길을 찾아간다. 양길은 막강한 세력으로 한강 유역을 장악하며 세력을 더 키우려던 참이었는데, 자신을 찾아온 궁예의 기세가 마음에 들어 수백 명의 병사를 내어준 뒤 현재 강원도 일대를 공략하라 명한다. 궁예가 이끈 600여 명의 군사는 세력을 넓혀가며 이후 3,500여 명까지 확장한다. 군대를 성공적으로 이끈 궁예는 양길의 부하에서 장군으로 인정받고, 정복한 지역의 민심 또한 얻으며 신라 동북부의 유력 호족으로 떠오른다. 거침없는 기세로 황해도 일대까지 평정해 나가는 궁예의 기세에 패서쪽 호족들은 스스로 궁예의 부하가 되기를 자처하는데 이때 궁예는 패서 지역인 송악의 호적인 왕륭의 아들 왕건을 만나게 된다.
*호족 :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했던 지방 세력
막강한 세력을 가지게 된 궁예는 자신의 꿈을 실현할 준비를 시작한다. 궁예는 한강 유역을 점령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데, 한강 유역은 비옥한 토지와 수운으로 나라의 경제력 강화와 육로와 해로의 확보로 사방으로 진출할 수 있어 중부권 장악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이 지역은 자신을 받아준 양길의 영토였다. 한강 유역 차지를 위해서는 양길과 대립은 불가피했고, 결국 궁예는 양길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양길이 궁예의 땅과 백성의 규모에 크게 노하며 먼저 습격하려 했는데, 이를 미리 알고 있던 궁예는 먼저 공격하여 양길을 크게 패배시켰다. 이렇게 궁예는 한반도 중부 지역을 점령하고 왕건에게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까지 진군할 것을 명하며 자신의 국가 고려의 건국을 선포한다.
궁예, 고려를 건국하다
901년 궁예가 세운 나라의 이름은 고려이다. 우리는 흔히 왕건이 세운 나라를 고려로 알고 있으나, 왕건 이전에 궁예가 901년, 왕건이 918년에 각각 고려를 세웠다. 궁예가 세운 나라는 교과서에서 후고구려라고 배운다. 국호의 뜻은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고구려라고 하지 않고 고려라고 했을까? 주몽이 세운 고구려는 장수왕 집권 시 국호를 고려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건국 초기는 고구려였지만, 장수왕에 이르러 고려로 바뀐 것이다. 결국 장수왕, 궁예, 왕건의 나라는 모두 고려인 것이다. 궁예가 국호를 고려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뜻을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에 복수를 결심하고 지방 호족들과 그 뜻을 나누는데 목적이 있었다.
후삼국 시대의 삼국 통일을 위해 궁예가 택한 첫 번째 행보는 바로 후백제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현재 나주 지역을 목표로 잡았는데, 이곳은 중국과의 교역로이자 비옥한 곡창 지대였기 때문이었다. 궁예는 나주 점령을 위해 왕건을 파견했고 왕건은 패서 지역 출신으로써 나주의 해상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며 나주 점령을 성공시킨다. 이것으로 왕건은 27세의 나이에 후고구려 최고 장수로 발돋움한다. 삼국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궁예는 송악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기로 계획한다. 송악은 패서 지역 호족들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왕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어 왕권 강화를 위한 철원 천도였다. 궁예의 철원 천도 프로젝트는 막대한 돈과 인력이 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백성과 호족들은 점점 궁예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궁예에 대한 호족들의 불만 중 하나는 궁예의 국호 변경이었다. 궁예는 901 고려, 904 마진, 911 태봉으로 국호를 바꿨는데, 초반과는 다르게 고구려 계승 의미를 지우려 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왕권 강화를 위해 한 수단은 신격화이다.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하며 미래에서 온 부처가 자신이라고 말했다. 민심을 모으고 호족을 장악하려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궁예는 경전 20여 권을 지었는데, 그 말이 요망하고 모두 도리에 맞지 않아 당시 명망 높은 승려인 석총이 용기를 내 궁예의 잘못을 지적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궁예는 석총을 철통으로 내려쳐 버린다. 궁예는 초반에 군대를 이끌었던 모습과 다르게 자기 뜻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점점 강압적인 모습으로 달라진다.
한편 궁예가 수도를 옮기자 후백제가 나주 지역을 공격하였고, 왕건은 나주를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궁예의 폭정을 피해 지방 근무를 자처한다. 왕건은 견훤과 덕진포에서 한판 대결을 벌이며 엄청난 대승을 거두는데, 승전보를 들은 궁예는 왕건을 수도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왕건에게 태봉의 이인자 '시중'으로 임명한다. 서로에 신뢰가 두터웠던 이 둘 사이에 어느 날 균열이 나기 시작하는데, 그 첫 번째 사건은 아지태이다. 아지태는 궁예의 옆에서 아첨을 일삼은 희대의 간신 중 하나로, 궁예의 마음에 들기 위해 같은 고향 출신을 모함한다.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하자 왕건이 나서 아지태의 자백을 얻어냈는데, 이 사건 이후 궁예를 따랐던 일부 세력들이 계급에 상관없이 왕건 편에 몰리며 왕건파와 궁예파로 나뉘게 된다. 두 번째는 위기의식을 느낀 궁예가 왕건에게 사람을 모아 반역을 꾀하지 않았느냐며 왕건의 마음을 관심법으로 읽으려 한 것이다. 반역을 극구 부인하던 왕건은 최응의 조언에 거짓으로 반역을 꾀하였다고 자백한다. 궁예의 곁에서 궁예의 횡포를 지켜본 최응이 왕건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라고 언질을 준 것이다. 왕건의 자백을 들은 궁예는 '경은 참 정직하다'라고 하며 금과 은으로 만든 말안장과 고삐를 선물한다. 그렇게 왕건은 최응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그동안 궁예가 보여준 모습 때문에 최측근조차 궁예에게 돌아섰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궁예의 평판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궁예의 부인 강 씨가 부디 옳지 않은 일을 그만하라고 간청하자, 궁예는 부인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고 모함하며 아내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유력 호족의 딸로 추정되는 부인 강 씨의 죽음은 부부 사이의 문제라기보단 궁예와 호족 간의 정치적 갈등이 낳은 비극이라 볼 수 있다. 918년 궁예의 폭정에 민심이 결국 폭발하여 늦은 밤 부하 장수들이 왕건을 찾아간다. 궁예를 쫓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고 청했지만, 왕건은 충심에 어긋난다며 이를 완강히 거부한다. 하지만 왕건 부인인 유 씨가 갑옷을 들고 나와 "대의를 세우고 폭군을 갈아내는 것은 옛날부터 있던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의 의견을 들으니 저도 화가 나는데 어찌 대장부가 가만있으십니까?"라는 유 씨의 말을 듣고 왕건은 장수들과 뜻을 함께하기로 결심한다. 결전의 날, 궁 앞에서 왕건을 기다린 사람이 무려 1만여 명이었고, 그렇게 혁명은 성공한다. 궁예는 왕건이 쳐들어온다는 소리에 도망칠 곳 없이 산에 피신했지만, 배가 고파 곡식을 훔쳐먹던 중 인근 주민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좋은 리더십과 통솔력을 보여주던 궁예는 후반으로 갈수록 난폭하고 잔인한 인물로 변한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적으로 들어야 한다. 비록 기록에서 궁예는 부인과 백성, 부하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폭군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이는 후반부 왕건이 정변을 일으켜 고려를 세우는 내용의 정당성을 위해 과장된 기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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