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26. 16:00ㆍ한국사
벌거벗은 한국사 6화에는 고려시대 무신정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기준이 1592년 임진왜란이라면 고려는 1170년 무신정변이다. 무신정변의 '정변'이란 지배층의 정치 변동이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일어난 사건을 뜻하는데 왜 고려시대 무신들은 정변을 일으켰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이라는 개념은 고려 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양반은 무반과 문반을 합친 단어로 무반은 지금의 군인·경찰, 문반은 공무원, 법관, 국회의원 정도라 볼 수 있겠다. 고려 초기만 해도 무반과 문반을 정확히 구분하지 않았는데 사회가 발전하면서 분업이 중요성이 대두되자 나라의 정치를 맡는 문신과 군사를 이끄는 무신으로 나뉜 것이다. 양반의 서열은 정1품에서 종9품으로 구분하였는데 문신과 무신이 올라갈 수 있는 벼슬에는 차이가 있었다. 3~9품은 무신과 문신 둘 다 가능했으나, 1품과 2품에는 문신만 오를 수 있었다. 1품, 2품에는 '재추'라는 벼슬이 있었는데 이들은 재추회의를 통해 왕과 함께 국가의 중요 사안을 논의하고 돕는 역할을 수행했다.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는 자리에 제외된 무신은 불만을 가질 법하였으나, 오히려 재추에 오르기 위해 문신의 관직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며 당시 사회에는 이를 차별이 아닌 차이로 수용하였다고 한다. 이런 가치관으로 고려 사회에는 점점 무보다 문을 우대하는 분위기가 퍼져나간다.
*재추 : 고려시대 왕을 제외한 가장 높은 직책
그러던 1144년 섣달그믐 밤. 문신이 무신을 얕보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왕이 새해를 맞아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 문신 김돈중이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운 것이다. 당시 무신들은 연회를 즐기지 못하고 왕과 문신들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김돈중이 촛불을 들고일어나 장난스럽게 정중부의 수염에 불을 붙인 것이다. 김돈중은 당시 새내기 문신이었고 정중부는 견룡군에 속해있는 나이 많은 대장군이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본 왕은 수염을 태운 김돈중이 아닌 정중부에게 벌을 내리려고 한다. 왜냐하면 김돈중의 아버지가 김부식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를 엮은 무소불위의 권력자 김부식의 아들인 김돈중은 과거에 2등으로 합격했지만, 아버지가 김부식이라는 이유로 1등으로 올라가며 내시로 임명될 정도로 아버지의 영향력을 누리고 있었다. 김돈중에 화가 난 정중부는 고함을 지르며 김돈중에게 주먹을 휘둘렀는데 이를 들은 김부식이 왕에게 정중부를 엄벌해줄 것을 청한 것이다. 왕은 김부식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정중부를 처벌하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정중부를 피신시키는 것으로 촛불 사건은 끝난다. 이 일로 정중부는 김돈중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고 무신들이 문신들에게 분노를 가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견룡군 : 고려 시대 왕을 호위했던 부대, 현 청와대 경호원에 해당
내시와 환관의 차이?
고려 시대 환관과 내시는 다른 직책으로 환관은 어린 시절 남성 구실을 못 하게 된 사람으로 대다수가 천민, 노예 출신이었으며, 궁 내 잡일을 담당하였다. 내시는 과거나 음서를 통해 선발된 문신으로, 왕명 전달 및 호위를 담당하는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이다. 흔히 우리가 내시라고 알고 있는 왕 옆의 시중을 드는 신하의 모습은 대부분 환관이다.
수염 사건 당시 고려의 왕은 인종이었는데 인종이 타계한 뒤 그의 아들인 의종이 왕위에 오른다. 의종은 어릴 적 공부에 재능을 보이지 않아 인종은 의종이 왕위의 부담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고, 어머니는 의종의 동생을 더 사랑하며 둘째를 왕으로 삼고 싶어 했다.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의종은 스승인 정습명의 도움으로 겨우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왕위에 오른 그는 언제든 쫓겨날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자신의 측근 세력을 키우려고 노력한다. 의종은 연회를 열어 신하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갔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 사치와 향락에 조정의 신하들은 불만이 쌓여가고 심지어 관직을 버리고 떠나기까지 한다. 의종 측근의 문신과 환관들만 득세하였고, 차별이 더 심해진 수준 낮은 처우에 무신들 또한 분노가 쌓여만 갔다. 무신들은 연회에 참가할 수 없었고 그 연회를 위한 정자, 연못을 만드는데 인력으로 동원되었는데, 도시락조차 제공되지 않아 서로 도시락을 나누어 먹으며 주린 배를 채웠다. 그중 도시락을 챙길 수도 없이 가난했던 군인은 아내가 자기 머리카락을 팔아 동료들과 먹을 음식을 마련할 정도로 무신의 상황은 열악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절에서 연등회를 마치고 돌아가던 의종의 가마 옆으로 화살이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의종은 이를 암살 시도라 판단하고 범인을 잡아들이라 명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범인은 고사하고 목격자 또한 나오지 않자 왕은 재추들을 질책하기 시작하는데, 이에 재추들은 의심되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한다. 잡혀 온 이들 중엔 의종의 동생의 하인도 있었는데, 가혹한 심문에 하인이 결국 거짓 자백을 해버리자, 의종은 바로 하인의 목을 베어 버리고 제대로 호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친위군 장교 14명을 위배 보낸다. 그런데 이 사건의 진범은 당시 의종 옆에 있던 김돈중이었다. 당시 좌승선이었던 김돈중이 탄 말이 갑자기 날뛰며 다른 병사와 부딪치자 그 병사의 화살이 가마 옆으로 쏟아진 것이다. 이를 의종은 암살로 오해하여 말할 틈도 없이 일이 커져 버렸고, 결국 억울한 노비의 죽음과 죄 없는 무신들의 처벌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일 이후에도 의종의 연회는 끊이지 않자 무신들은 결국 폭발하여 쿠데타를 계획한다.
*좌승선 : 고려시대 왕의 비서 직책
쿠데타를 처음 계획한 것은 왕의 곁을 지키던 견룡군이었다. 견룡군의 하급 지휘관이던 이의방과 이고는 쿠데타를 계획하며 함께 할 고위 무신을 찾는다. 두 사람은 처음에 정3품 상장군의 아들인 우학유를 찾아갔는데, 우학유는 문신들의 세력이 워낙 크니 자칫하면 무신들이 해를 입을 수 있다며 거절한다. 그리고 이들은 상장군인 정중부를 찾아간다. 이의방과 이고가 정중부에게 분함을 토로하자 정중부는 정변에 동참하기로 한다. 그렇게 4개월 후, 이들에게 정변 실현의 기회가 찾아온다. 의종이 궁궐에서 먼 곳으로 적은 수의 호위 부대와 무신만 함께 나들이를 계획한 것이다. 그리고 호위 부대는 견룡군이 맡게 되었다. 그렇게 나들이를 떠나던 날, 순조로웠던 왕의 행차에 갑자기 의종이 가마를 멈추라고 한다. 그러고는 예정에 없던 무예 행사를 열자고 한다. 고려 시대에 오병수박희라는 맨손으로 무술을 겨루는 무예 행사가 있었는데 오병수박희에서 실력을 뽐내면 관직을 받거나 승진할 수 있어 무신들에겐 좋은 기회였다. 그렇게 나이 많은 대장군 이소응과 한 장수가 맞붙는데 젊은 장수에게 이소응이 밀리자 지친 이소응은 경기장 밖으로 도망치려 한다. 그러자 의종의 측근인 문신 한뢰가 내려와 노장 이소응의 뺨을 쳐버린다. 노장군 이소응은 계단 아래로 구르며 넘어지는데 이를 본 왕과 신하들은 박장대소하며 비웃는다. 정변을 일으키는 당일, 문신에게 무신이 치욕을 당하는 일이 또 벌어진 것이다. 분노에 찬 이고는 정중부에게 칼을 뽑으려는 신호를 보내며 정중부가 허락만 하면 그 자리에서 정변을 일으킬 기세였다. 하지만 이고의 의도를 파악한 정중부는 계획과 달리 행동할 시 생길 수 있는 변수에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성공적인 쿠데타를 위해 분노를 억누른 채 최종목적지인 보현원으로 향한다. 왕이 보현원으로 들어가자 기회를 엿보던 무신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문신들이 저항할 새도 없이 칼을 휘두른다. 쿠데타 세력들은 관모를 벗고 어깨를 내놓는 약속한 외관이 아닌 사람을 모두 베어버린다. 정중부는 이의방과 이고를 개경으로 보내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라도 씨를 남기지 말고 죽이라 명한다.
*서리 : 관청의 하급 실무자
이후 의종과 함께 궁으로 돌아온 정중부는 정변 4일째 되던 날 의종을 거제도로 추방한다. 그리고 왕위에 인종의 셋째 아들인 명종을 올린다. 정변에 성공한 무신들이 왕위에 오르지 않은 이유는 고려 시대에는 왕이 되는 사람을 특별하게 생각했는데, 고려를 세운 왕건의 조부는 용왕의 딸과 혼인했다는 설화가 있어 왕건의 후손들은 용의 후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는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라 판단한 것이다.
보현원에 의종과 동행했던 김돈중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먼저 도망쳤다. 하지만 김돈중에 대한 오랜 원한으로 그는 공개수배되어 하인의 밀고로 체포된다. 그렇게 붙잡힌 후 김돈중은 살해당한다. 일부 살아남은 문신들을 이고는 전부 죽이자고 했으나 정중부는 무신에게 호의적이었던 문신은 살려두자 말한다. 문신을 모두 죽일 경우 국정 운영에 한계가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변 세력에 반대한 이들이 등장하고, 폐위되어 추방된 의종을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생긴다. 하지만 이 반란은 힘없이 진압되고 의종은 결국 살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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