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었다

2023. 9. 16. 16:55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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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의 포스터

 

사도 세자의 탄생

1762년 사도세자의 탄생은 영조의 큰 기쁨이었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42세의 늦은 나이로 얻은 늦둥이 아들이다. 영조는 25살에 효장세자를 얻었는데 효장세자가 10살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계자가 중요한 왕실에서 첫아들을 잃은 슬픔과 후계자가 없어 초조했던 영조에게 효장세자 이후 7년 만에 얻은 아들이었다. 사도세자의 탄생은 영조뿐 아니라 조선의 기쁨이 되었고, 사도세자는 돌이 막 지났을 무렵 조선 역대 최연소의 세자로 책봉이 된다. 

 

사도는 3세 때부터 왕세자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그의 총명함과 영특함에 영조와 신하들은 한없이 기뻤다고 한다. 사도의 타고남도 있겠지만, 영조는 늦둥이 아들 육성에 총력을 다했다고 전해진다. 영조가 사도의 조기교육에 집착한 이유는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이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숙종의 후궁으로 무수리 출신의 천민이었다. 천민 출신의 부모를 둔 조선의 왕은 영조가 유일했다. 또한, 영조는 아픈 형을 위해 경종에게 간장게장을 보냈었는데, 이를 먹고 경종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영종은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형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의혹을 받게 되었다. 출신부터 형을 죽였다는 오명까지 쓴 영조는 자기 아들은 구설수 없이 완벽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도의 교육에 힘썼다.

 

하지만 사도를 향한 영조의 마음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10살이 된 사도세자에게 영조가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고 질문을 하니 세자가 싫을 때가 더 많다고 답하자, 솔직해서 좋다고 했지만 이후 어려운 질문들로 사도세자를 압박하며 신하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다. 또한 일찍이 무예를 좋아하고 솜씨가 뛰어났던 사도 사제에게 조선에서는 무보다 문을 더 중시하니 공부를 더 하라고 폭언까지 했다고 한다. 사도가 어지럼증을 호소해도 공부하기 싫어 꾀를 부린 것이라 생각하며 사도세자를 압박해 갔다. 

 

이후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며 세자에게 정사에 살펴볼 기회를 주었다. 영조는 신하들의 말만 듣고 판단하면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으니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들에게 묻고 자신의 의견을 참작한 뒤 결정하라고 조언을 해준다.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에서 자기 능력을 보여주어 아버지의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대리청정의 첫 안건은 방어기지 이전 건이었다. 성진에 있는 방어기지를 길주로 옮기자고 신하가 제안하자, 사도세자는 방어기지를 길주로 옮기는 것을 허락한다. 그런데 뒤에서 듣고 있던 영조는 방어기지를 성진으로 옮긴 것은 나의 결정인데 길주로 다시 옮기는 건 경솔하지 않으냐 나에게 왜 물어보지 않냐며 사도세자를 막아선다. 사도는 신하들 앞에도 또다시 아버지에게 질책받았고, 그다음 날 아버지로부터 모든 결정에 자신의 허락을 받을 것을 통보받는다. 그 이후에도 영조는 백성이 춥고 배고프거나 가뭄이 드는 천재지변에도 세자의 덕이 없어서 그렇다며 늘 사도세자를 꾸중했다. 

 

어느 날 사도세자는 헛것을 보기 시작한다.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고 병이 깊어가자 사도세자와 영조의 만남은 뜸해진다. 문안 인사도 오지 않는 사도세자를 영조는 예고도 없이 찾아가는데 아버지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도세자의 모습을 보고 영조는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기근이 들어 곡식이 부족해 금주령 내린 상태였다. 사도세자는 마시지도 않은 술을 마셨다고 오해받았지만 영조에게 술을 마셨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를 지켜보던 상궁이 안타까운 마음에 영조에게 술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맡아보라고 할 정도였다. 자기 잘못이 아님에도 자신을 나무라는 아버지로 인해 사도세자의 몸과 마음은 점점 병들어 갔다. 

 

그렇게 어느 날 참았던 화가 폭발한 사도세자는 우물에 빠져 죽으려고 하거나, 내시에게 칼을 휘두르며 잘린 목을 들고 부인을 찾아가 보여주기도 한다. 사도세자는 의대증이라는 병이 있었는데 옷을 입는 것을 괴로워하는 병이었다. 옷이 맞지 않으면 바로 벗어던지기 일쑤였으며, 옷에 귀신이 있다며 태워버리기도 했다. 이를 들은 영조는 사도세자를 찾아가 이유를 묻자, 사도세자는 '마음속에서 화가 올라오면 견디지 못해 사람이나 짐승을 죽여야 마음이 풀립니다. 국왕께서 사랑하지 않으시기에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그랬습니다'라고 답한다. 영조는 이를 듣고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아들의 마음을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고 사도세자의 살인은 끝나지 않았다.

 

사도세자로 인해 목숨을 잃은 자는 약 100명이라고 한다. 사도 사제의 살인을 알고도 영조가 묵인한 이유는 살인죄를 공론화하면 세자 지위를 폐위시키고 처형을 해야 하기에 이는 사도 세자의 개인 문제를 넘어서 조선 왕실의 권위 실추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 씨는 영조에게 사도세자를 죽여달라는 청을 한다. 사도세자가 밤에 칼을 들고 영조가 있는 경희궁으로 가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왕을 죽이려는 것은 반란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영빈 이 씨가 아들을 죽여달라 청한 것이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하라 명한다. 사도세자는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지만, 영조는 결국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사망하였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처벌할 경우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즉위가 어려워 정조를 보호하기 위해 공식적인 죄인의 처벌 방식이 아닌 뒤주에 갇혀 그를 죽였다. 아버지가 아닌 군주로서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이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사도세자의 신분을 회복시키고 슬퍼할 사, 슬퍼할 도 '생각하니 슬프다. 슬픔을 잊지 못하고 생각에 잠긴다'라는 뜻의 시호를 아들에게 지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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