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3. 21:24ㆍ한국사
환관은 왕실의 수족으로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중심이었다. 환관은 왕의 측근으로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누렸는데, 이런 환관이 되기까지 견뎌야 하는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양반부터 천민까지 환관이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서의 환관
벼슬을 하는 관리라는 뜻의 환관은 남성성을 상실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조선의 환관은 '내시'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었는데, 고려 시대의 환관과 내시는 의미가 달랐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동일해진다. 조선 시대의 환관은 왕실 사람의 시중을 들거나, 왕과 신하 사이에서 나랏일을 수행했다. 노비와 신하들이 있음에도 환관이 필요했던 이유는 왕의 여자들 때문이었다. 왕비와 후궁 외에도 궁궐 내에는 궁녀인 여자들이 많았기에 남성성을 잃은 환관은 왕실 여성과 어울려도 안심할 수 있는 남성이었다.
환관은 사고로 고자가 되거나 태생적으로 생식 기능이 미숙한 이들이 자격이 되었다. 조선 시대 환관의 숫자는 경국대전에 140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궁궐은 넓고 환관이 하는 일이 많아 조선 후기에는 400명으로 늘어난다. 400명의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이 환관이 되었다는 것은 선천적 사유뿐 아니라 환관이 되기 위해 스스로 남성성을 제거한 이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가 주신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였기 때문에 이는 사회적으로 허용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환관이 되기 위한 열망으로 불법 시술을 통해 사고를 당한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환관의 대부분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었는데, 신분과 관계없이 궁에서 일하며 돈을 벌 수 있어 가난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환관을 택하였다. 양반의 자제는 궁궐의 고급 정보를 얻기 위해 환관이 되기도 했다. 환관의 월급은 최고 품계의 상선이 되면 쌀 1석 1말, 콩 10말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는 정1품 영의정보다 많은 양이다. 쌀 1석은 성인 남성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양으로 녹봉 외에도 정년이 없는 환관은 은퇴 후 매달 쌀과 일부는 집까지 받기도 하였다.
환관이 되는 과정
환관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소환이라는 인턴 과정이 있었다. 무려 10년간의 소환 과정 평가 후 정식 환관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10살 전후에 소환 선발이 되면, 10년의 수련 후 20살쯤 정식 환관으로 채용되었다. 소환의 채용 절차는 신체검사와 궁중 상식 테스트 및 3가지 인내심 테스트를 수행한다. 소환 선발 시험에 뽑힌 약 90명은 내시부에서 기초 업무 교육과 10년의 실무를 수행한 후 정식 환관이 될 기회를 얻었다.
정식 환관이 되는 마지막 관문은 생식 기능 검사이다. 소환 선발 시 신체검사를 치렀지만 어른이 되어 생식 기능이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관의 정체성은 남성성 제거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절차였다. 이렇게까지 확인하는 이유는 연산군 시절 환관이 궁 내의 여인과 정을 통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그를 곧바로 참형하고 조선 최초로 환관 전원의 신체검사를 시행하였는데 이때 발각된 환관 김세필은 본인은 물론 부모 형제까지 벌을 받았다.
환관은 궁궐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
환관은 품계와 직급에 따라 역할이 나뉘어있는데 종 2품 상선은 궁 내 식사 감독을 맡았다.
명종과 환관 박한종
중종부터 명종까지 3대의 왕을 모신 환관 박한종은 환관의 한계인 종 2 품을 뚫고 종 1품까지 올라간 환관이다. 박한종은 업무 중 실수로 경복궁에 화재를 일으키는데 중죄를 저지른 박한종을 명종은 감싸준다. 명종이 왕이 되는데 박한종이 큰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명종 전 인종이 후계자도 없이 병세가 위독해지자 형제들은 다음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인 명종에게 박한종은 인종의 상태를 살뜰히 명종에게 알리며 즉위를 도왔다. 궐내에서 발생하는 일은 절대 함구해야 하는 환관이 왕의 건강 상태를 전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차기 왕위가 명종에게 갈 것이라고 예상한 박한종이 노련한 처세술을 부린 것이다. 그렇게 명종은 왕위에 오르고 즉위 후 박한종을 내수사(조선시대 왕실 재정을 관리한 기관)의 총책임자인 내수사제조로 임명한다. 내수사제조가 된 박한종은 명종을 등에 업고 사대부의 땅을 빼앗는 등 여러 악행을 저지르는데 이를 눈감아 주던 명종도 신하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결국 박한종을 궁에서 내쫓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박한종을 다시 복직시키고 왕세자의 교육 담당으로 임명한다. 세자시강원이라고 하는 조선시대 왕세자 교육기관에서 원자를 보살피는 중요한 임무를 박한종에게 맡긴 것이다.
이런 악행을 저질렀던 박한종 같은 환관이 있었던 반면 왕가 옆에서 자기 소임을 다했던 환관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연산군 시절의 김처선이다. 김처선은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가장 많은 왕을 모셨던 베테랑 환관이었다. 하지만 연산군 시절 그의 폭동을 막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하는데, 결국 연산군에 의해 혀가 잘리고 잔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환관은 생식 능력을 잃었지만, 자식을 가지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대를 이어가기 위해 다른 성씨를 가진 아이를 입양하는 것을 국가에서 족보까지 만들어 인정해 주었다. 조선은 조상을 모시는 제사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양자를 허락하고, 왕실 역시 환관이 필요하니 환관의 아들이 다시 환관이 될 수 있도록 하면서 안정적인 환관 수급이 가능하게 하였다.
이런 악행을 저질렀던 박한종 같은 환관이 있었던 반면 왕가 옆에서 자기 소임을 다했던 환관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연산군 시절의 김처선이다. 김처선은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가장 많은 왕을 모셨던 베테랑 환관이었다. 하지만 연산군 시절 그의 폭동을 막기 위해 연산군에게 직언하는데 연산군은 그를 혀를 자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었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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