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17. 23:04ㆍ한국사
몽골군이 작은 나라인 고려를 공격한 이유
몽골은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나라다. 당시 몽골군은 모든 나라에 공포의 대상이었고, 정복한 지역민들을 포로로 잡아 위장하여 그 규모와 위용을 더욱 키워나갔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영토를 확장하던 몽골이 어느 날 조그만 나라인 고려를 침략한 이유는 고려에 사신으로 보낸 저고여가 고려에 방문 중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고려가 저고여를 죽였다고 생각한 칭기즈칸은 저고여 사망 6년 후인 1231년, 3만의 병력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다. 고려와 몽골 사이의 전쟁인 여몽 전쟁은 30년간 6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한반도 역사상 가장 긴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몽골이 저고여 사망 후 바로 침략하지 못한 이유는 당시 서방 원정 중이던 칭기즈칸이 1227년에 사망하고 새로운 칸이 즉위하며 내부 정비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편 몽골군의 침략을 앞둔 고려는 최 씨 무신정권의 시대였다. 고려는 쿠데타로 무신들이 권력을 쥐었는데 100년간의 집권 중 최씨 집안은 약 60년간 대를 이어 국정을 다스렸다. 최 씨는 세계 최강의 몽골군 침략에 대해 고려 또한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다고 자만하였고, 고려는 내부 정세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몽골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시작되었다.
몽골의 고려 침략
여몽 전쟁을 지휘한 몽골 제국의 총사령관의 이름은 살리타이다. 그는 선발대를 꾸려 고려로 향하는 최단 노선으로 빠르게 남하하였고 그 뒤를 주력부대가 따르며 고려를 공격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뒤따르던 부대는 내륙 진출을 위해 고려 북부를 공격하였다. 몽골군의 목표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모든 군대가 개경으로 갈 경우 다른 지역에서 공격해 올 위험이 있기에 세 부대로 나눠 전략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그런데 파죽지세의 몽골군이 고려의 귀주성에서 고전한다. 몽골군을 막아낸 귀주성의 장군은 박서였다. 귀주성에 도착한 몽골군은 수적인 우세와 다양한 전술로 귀주성을 공격하였는데, 고려군은 날이 크고 강한 대우포로 몽골군을 방어하며 몽골군이 땅굴을 파면 쇳물을 부어 끝까지 막았다. 이렇게까지 고군분투하며 싸운 이유는 귀주성만은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4개월 동안 지속된 귀주성 전투에는 고려 중앙군의 지원은 없었다. 고려 실권자들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죽고 죽이는 상황이라 중앙군은 몽골군에 대응하기는커녕 최 씨 무신정권의 안위를 지키는 데 급급했다. 지원도 없이 끝까지 귀주성을 지키던 김경손 장군은 이기기 위한 전술로 몽골군을 급습하는 계획을 세운다. 성문을 넘어오는 몽골군을 방어하기 바빴던 전과 달리 성문 밖으로 나가 직접 몽골군을 공격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수적인 열세에 성공할 수 있을지 오히려 아군을 잃는 것은 아닐지 걱정하였지만, 김경손 장군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김경손 장군의 기세에 몽골군이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박서와 김경손 장군을 포함한 귀주성 사람들은 기뻐하였지만 기쁨도 잠시, 고려는 이미 몽골군에 개경이 함락된 후였고 고려 정부는 박서에게 몽골군에 항복할 것을 명령한다. 귀주성을 끝까지 지켜냈지만, 정부의 명령대로 박서와 김경손은 결국 몽골군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몽골군은 위협을 느낀 박서를 죽이라고 하였지만 박서의 관직을 뺏는 걸로 끝난다. 고려의 항복을 받아낸 몽골군은 1232년 철수한다. 하지만 귀주성 전투에 대한 당시 몽골군은 '성안에 있던 장수들은 훗날 모두 장군이나 재상이 될 것'이라 평가하였다고 한다.
1차 여몽전쟁 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 최 씨 정권은 고려의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려고 한다. 강화천도를 진행하며 최 씨 정권은 전쟁을 대비하기는커녕 자신들이 지낼 궁궐을 호화롭게 지으며 백성들의 노동을 착취한다. 백성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고, 고려 정부를 비판하며 봉기를 일으키며 고려의 내정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몽골군은 고려의 강화천도에 분노하며 강화천도 3개월 만에 다시 고려를 침략한다. 2차 여몽전쟁에도 살리타가 몽골군을 이끌고 먼저 고려로 들어왔는데, 몽골군의 침략 경로를 예상하고 잠복하고 있던 김윤후가 쏜 화살에 살리타가 사망한다. 김윤후는 고려 후기 승려이자 무신이었는데 처인부곡이라는 작은 성에서 몽골군의 장수를 물리치며 2차 여몽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이후 몽골은 살리타의 복수를 위해 고려에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3차 침략에는 경상도까지 점령되자 고려는 결국 몽골에 항복하고 만다. 여몽전쟁을 치르며 고려는 몽골을 힘으로 이길 수 없음을 체감하자 부처의 힘을 빌리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고려가 항복한 이후에도 몽골은 온갖 이유로 고려에 침입을 이어갔는데, 몽골군은 고려가 개경으로 다시 수도를 이전할 것을 거부하자 1만의 병력으로 침략한다. 2차 여몽전쟁의 공로로 무관 관직을 받은 김윤후가 충주성을 지켜냈지만, 장기간의 전쟁으로 고려군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더 이상 몽골군과 항전할 수 없었던 고려는 강화도에서 나와 몽골 사신과 협상을 시작한다. 몽골이 요구한 것은 내정 간섭을 위한 다루가치 파견, 고려의 성곽 허물기, 몽골군 군사가 고려에 주둔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몽골이 고려를 완벽히 통제하기 위한 세 가지 계획이었다. 이후에 몽골은 고려에 국왕 친조를 요구하였는데, 고려 국왕은 허수아비의 존재라 혹여나 국왕의 입지가 높아질 것을 우려하여 무신정권은 친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던 1258년 최 씨 무신정권의 독재에 대한 불만과 30여년간의 여몽전쟁에 지친 부하들이 항전을 주장한 최의를 죽이면서 1258년 고려 정부는 개경 천도를 약속하며 여몽전쟁은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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