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왜 며느리 넷을 쫓아냈을까

2023. 8. 2. 20:46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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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 문종은 공부부터 예체능까지 못 하는 게 없었다. 적장자로 태어난 귀한 왕세자인 문종의 아버지 세종은 문종의 세자빈을 무려 3년간 골랐다고 한다. 문종의 결혼은 조선 건국 이래 첫 적장자를 통한 왕위 계승이자, 정통 왕위 계승으로 유교적 가치를 실현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문종의 첫 세자빈은 당시 군대 최고 지휘관 정3품 상호군인 김오문의 딸이 되었다. 세자빈의 휘빈이란 호를 받아 세종의 첫 번째 며느리가 된 휘빈 김 씨. 하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2년여 만에 파탄 난다. 결혼 당시 문종은 14세였는데 세자는 15세 봄부터 합방이 가능하였다. 결혼 직후 1년 동안 부부생활은 물론 문종은 휘빈 김 씨를 좋아하지 않아 오히려 궁녀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그렇게 1년 뒤 문종은 15세가 되었지만, 그해 휘빈 김 씨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다. 유교 예법에 따라 휘빈 김 씨는 1년 동안 할아버지의 상을 치러야 했고, 사후 1년간은 남편과 합방할 수 없었다. 휘빈 김씨는 결혼한 지 2년이 지나도록 문종의 마음도, 자식을 낳을 기회도 얻지 못한 것이다. 문종의 무관심에 극도로 불안해진 휘빈 김씨는 결국 문종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한 궁녀를 찾아간다.

 

문종의 마음을 얻기 위한 세자빈의 비책

휘빈 김 씨가 은밀히 도움을 청한 자는 궁녀인 호초였다. 호초는 양반가 첩의 딸이었는데, 어머니가 첩인 호초라면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할 첩의 비법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호초에게 휘빈 김 씨가 원한 건 문종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기술인 압승술. 다른 여인의 기를 눌려 사랑싸움에서 이기는 술법이었다. 휘빈 김 씨는 문종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세자빈이 절대 해서는 안 될 비술에 손대게 된다.

 

호초가 휘빈 김 씨에게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을 태워서 그 재를 술에 타 세자가 마시면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며, 문종과 가까운 궁녀는 효동과 덕금이라고 일러준다. 하지만 결론은 휘빈 김 씨는 이 비술을 세 번이나 실패한다. 불안해진 휘빈 김씨는 다시 호초를 불러 전보다 더 충격적인 방법을 듣게 된다. 하지만 궁궐에서는 세자빈이 비술을 쓴다는 소문이 돌게 되고 결국 세종까지 알게 된다. 세종이 호초를 불러내자 호초는 낱낱이 전말을 고하고 휘빈 김씨 역시 시아버지 앞에서 자백한다. 예비 국모인 세자빈을 통해 조선의 태평성대를 꿈꾼 세종은 크게 실망하여 결국 둘을 이혼시킨다. 전 국민에게 유교적 이념을 가르치려고 교훈서인 삼강행실도까지 편찬한 세종은 이혼을 억제하려고 노력하던 왕임에도 불구하고 문종 부부의 이혼을 선택한 것이다. 세종은 휘빈 김 씨를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호초는 목을 베이는 참형을 당한다.

*삼강행실도 : 1434년 세종의 명으로 충신, 효자, 열녀의 행실을 모아 편찬한 교훈서

 

휘빈 김씨를 내쫓은 세종은 다음 날 조선에 금혼령을 내린다. 세자빈을 다시 뽑기 위해 조선에 혼인을 금한 것이다. 세자빈을 뽑는 과정은 삼간택이라 하며 3번에 걸쳐 세자와 세손의 배우자를 고른다. 삼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으로 조선 후기에 이 절차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금혼령이 내려지면 금혼 대상 연령인 평균 10~15세 처녀들은 지원서인 '간택 단자'를 제출한다. 간택 단자에는 나이, 사주 등의 개인 정보와 관직을 통한 가문의 명성을 알 수 있었고, 집안의 정치적 성향까지 고려하였다. 이후 초간택에는 기본예절을 평가하고 재간택에서는 식사 예절, 삼간택에는 왕실 최고 어른들의 압박 면접이 이뤄지며 성품과 현명함을 평가하였다. 초간택에서 30명, 재간택 5~7명, 삼간택 3명으로 후보를 추리고 세자빈이 결정된다. 

 

첫 번째 며느리를 내쫓은 세종은 두 번째 세자빈 간택에서는 얼굴을 중요시해 보았다. 휘빈 김 씨와 문종이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두 번째 며느리는 외모가 출중한 여인으로 정하려 한 것이다. 그렇게 두 번째로 간택된 여인은 순빈 봉 씨. 세종은 세자빈으로 책봉된 순빈 봉 씨에게 직접 열녀전을 선물할 정도로 마음을 썼다. 그러나 순빈 봉 씨는 며칠 공부하는가 싶더니 열녀전을 뜰에 던져버린다. 그리고는 궁궐에 술을 숨겨놓고 마시면서 취한 채로 돌아다니거나 궁녀를 구타하기도 했다. 이를 들은 세종은 화가 났지만, 며느리에 대한 불만보다 세손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하여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재혼하고 16세가 되어도 문종이 아들을 보지 못하고 순빈 봉 씨와도 사이도 좋지 않자 세종은 결국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열녀전 : 중국 명나라 때 모범이 될 만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엮은 역사서

 

세손을 위한 세종의 특단의 조치

세종은 명문가 출신의 여인 세 명을 세자의 소실로 간택한다. 정통성 있는 왕실의 후계자가 세자빈에게서 태어나면 더욱 좋겠지만, 적자가 없을 시를 대비하여 아들을 낳을 소실을 들인 것이다. 그렇게 세종의 바람대로 세 명의 소실 중 권 씨가 먼저 임신하게 된다. 권 씨의 임신 소식에 순빈 봉씨는 분노하며 소실에게 밀렸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임신한 소실을 질투한 순빈 봉 씨는 임신했다는 자작극을 벌이며 왕을 속이려 하지만 금방 들통나버린다. 열녀전, 술, 폭행에 이어 거짓 임신으로 왕을 속인 세자빈이지만 세종은 이번에도 참았다. 세자빈을 두 번이나 폐출한다면 사람들에 모범이 되지 않으므로 처리할 바를 모르겠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순빈 봉 씨의 동성애 스캔들이 터진다. 소쌍이라는 궁녀를 순빈 봉 씨가 강제로 희롱하며 동침했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유교의 기본 원리인 음양의 조화, 가계 계승이 불가한 동성애는 혼인의 중대한 결격 사유였다. 결국 세종은 재혼한 지 7년 만에 두 번째 며느리를 쫓아낸다.

 

문종의 세 번째 며느리는 3명의 소실 가운데 1년 전 딸을 낳은 권 씨가 되었다. 문종의 세 번째 세자빈 선택에 주목할 점은 문종은 소실 중 홍 씨를 낫게 여겼지만, 아버지인 세종의 뜻에 따라 권 씨가 된 것이다. 문종이 23세가 되도록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대를 잇기 위해 이미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는 권 씨를 세종은 택했다. 세종의 바람대로 권 씨는 세자빈 책봉 후 5년 만에 아들을 낳는다. 세종은 고대하던 원손을 보게 되었지만, 손자가 태어난 바로 다음 날 세자빈 권 씨가 산후병으로 사망한다. 적장자 단종을 본 문종은 다음 날 아내를 잃었다. 세 번째 아내가 죽고 세자 문종은 결국 아내를 맞이하지 못한 채 왕위에 오른다. 문종은 재위 동안 왕비가 없었던 조선의 유일한 왕이 된다.

 

세종은 이후로 문종이 아닌 자신의 아들 중 2명의 며느리를 더 쫓아낸다. 넷째 아들 임영대군을 남 씨 부인과 이혼시키는데 사유는 병이었다. 남 씨 부인이 12세가 넘도록 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혀가 짧고 미친 듯한 모습을 보여 이혼 사유가 되었는데 세종의 아내인 소헌왕후가 반대하였지만 결국 세종은 이 둘을 이혼시킨다. 여덟 번째 아들인 영응대군은 세종이 애지중지한 막내아들이었다. 영응대군의 간택에도 직접 참여할 정도로 애정을 쏟았는데 영응대군과 송 씨 부인이 혼인한 지 5년 만에 또 이혼시킨다. 이번에도 병이 있다는 이유였다. 영응대군의 이혼은 영응대군은 이혼할 뜻이 없었지만 오로지 아버지 세종의 뜻에 따랐다고 한다.

출처 : 벌거벗은 한국사 8화

세종의 애민 정신은 며느리에게는 예외였다

고치기 힘든 병을 뜻하는 악질은 칠거지악(유교에서 남편이 아내를 쫓아낼 수 있는 일곱 가지 사항) 중 하나였다. 병으로 인해 자식을 낳지 못할까 봐 세종의 며느리들은 내쫓겼다. 하지만 병으로 쫓겨난 임영대군의 전 부인 남 씨는 무려 70대까지 장수하였고 영응대군의 부인 송 씨도 딸을 2명이나 낳았다고 한다. 그리 심각한 병이 아니었지만 그만큼 세종과 조선 사회에서 왕실의 계승은 중요한 사항이었을 것이다. 

 

< 칠거지악 >

1.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것

2.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

3. 부정한 행위

4. 질투

5. 유전병

6. 말이 많은 것

7. 훔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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