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역사 한국의 도자기를 노린 일본

2023. 7. 13. 11:30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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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비 내리는 새벽, 경복궁을 빠져나가는 가마 행렬에 조선의 14대 왕 선조가 타고 있었다. 일본은 명나라 정벌을 위해 조선에 길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고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침공하였다(임진왜란). 90여 척의 배로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단 17일 만에 조선 지방의 성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한양의 코앞까지 들어온다. 선조는 평양성에서 국경까지 쫒기다 결국 명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고 조·명 연합군에 일본군은 경남 해안까지 퇴각하지만 밀려난 곳에서 버틴다. 일본은 조선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명나라에 협상을 요구하는데, 그 협상 조건은 첫 번째, 명나라 황녀를 일왕의 후궁으로 줄 것 두 번째, 조선 8도의 절반인 4도를 일본에 줄 것 등이 있었다. 무리한 요구에 4년간의 논의에도 협의가 되지 않자 1597년 일본이 다시 조선을 공격한다(정유재란). 1차 침략(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목표는 명나라였으나, 2차 침략(정유재란)의 목표는 바로 조선이었다. 그렇게 일본은 조선 땅에 들어와 무자비하게 조선인을 살해하고 또 약탈했다. 

*임진왜란(1592~1598) : 일본이 명나라 정벌을 위해 조선의 통과를 요구하고 이에 불허하자 침공. 정유재란과 함께 임진왜란으로 묶음.

*정유재란(1597) : 임진왜란의 정전 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일본군이 재차 조선을 침공

 

일본인에게 잡혀간 조선인들을 짐승처럼 취급당했다. 조선인을 소나 말처럼 다루며 짐을 옮기게 하고, 짐을 다 옮긴 후에는 전혀 쓸모없는 소는 필요 없다면서 가죽을 벗기고 먹어 치워버렸다. 인신매매 상인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줄에 묶어 끌고 갔는데, 이들은 이탈리아, 포르투갈, 인도, 마카오, 마닐라 등 세계 곳곳에 국제 노예로 팔렸다. 조선인 노예가 전 세계 노예 시장에 풀리자 노예 시세가 1/6로 떨어질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고 한다. 일본이 조선인을 잡아간 이유는 일본 내부의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고 조선인을 팔아 부족한 군비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 중에는 일본군이 귀하게 선별해서 끌고 간 조선인 포로가 있었는데 그들은 세공 기술자와 바느질 잘하는 여인, 손재주가 있는 여인이었다. 당시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며 가장 탐냈던 것은 조선의 자기 기술이었다. 

 

일본에 빼앗긴 조선의 자기 기술

조선은 원나라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기 기술이 발달한 나라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유독 조선의 자기 제조술을 탐낸 이유는 일본에는 '다도'라 하는 차를 마시는 모임이 최고위 권력층만 누릴 수 있는 행사였으며, 이에 따라 차와 고풍스러운 찻잔이 부의 상징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다도를 즐겨 영주와 무사들이 뇌물로 찻잔을 바치는 일도 많았는데, 그가 가장 아끼던 단연 최고의 그릇이 조선인들이 만든 이도다완이었다. 일본은 당시 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없어 나무 그릇이나 도기를 사용했다. 그에 비해 섬세하고 잘 다듬어진 조선의 자기인 이도다완은 그 기품있는 모양새로 일본 권력층의 부와 명예의 상징이 된 것이다. 

 

일본이 자기를 만들지 못 했던 이유

일본이 자기를 만들지 못했던 이유는 세 가지다. 첫 번째, 자기의 재료가 무엇인지 몰랐다. 조선 자기는 순백의 색상이 특징이었는데, 그 빛깔을 제대로 내려면 장석이라는 하얀 광석이 필요했다. 장석을 곱게 갈아 만든 고령토가 자기의 필수적인 재료였는데 일본은 장석을 갈아 고령토를 얻는 방법 자체를 몰랐다. 두 번째, 고화력의 가마를 만들지 못했다. 자기는 1300도 이상의 높은 온도로 만들어져 그 이상의 온도를 유지 할 수 있는 가마가 필요하다. 일본의 가마는 최대 1000도까지밖에 안 되어 자기를 만들기에는 부적합했다. 세 번째, 높은 온도를 견뎌낼 유약을 만들지 못했다. 도자기의 표면에 덧씌우는 약인 유약은 유리처럼 코팅하는 역할을 해 변식을 방지하고 흠집 나지 않도록 표면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자기는 높은 고온으로 구우니 높은 온도를 견뎌낼 유약이 필요한데 이를 만들 수 없었다.  자기를 만들 기술이 없어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일본은 전쟁을 기회로 삼아 조선의 기술을 훔치기를 시도한다. 

 

조선의 자기장을 끌고 간 일본

임진왜란 후 조선의 왕실에서는 음식을 담을 그릇이 없어 연회를 포기할 정도로 일본은 조선의 그릇을 모두 가져갔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사기장들이 일본으로 끌려가거나 목숨을 잃어 기술의 전파가 늦어져 그릇이 없어 잔치가 무산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일본은 조선 땅에서 약 8년간 사용할 수 있는 분량의 고령토와 약탈한 전리품을 부산으로 모두 모아 일본 규슈로 가져갔다. 일본으로 끌려간 이삼평과 조선의 사기장들은 규슈에 정착하여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선에서 가져온 고령토가 바닥나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자기를 만들어야 했던 그들은 일본에서 고령토를 찾아 나선다. 그렇게 규슈를 떠난 이삼평 일행은 아리타 지역의 이즈미산에서 다량의 장석을 발견한다. 그 양은 무려 400년간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양이어서 이들은 이즈미산 근처에 가마터를 잡고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도자기 마을을 형성한다.

 

그렇게 1616년 일본에서는 일본 내 광석으로 만든 최초의 백자가 등장하고, 약 100여 년 동안 수출한 아리타 도자기의 수는 약 120만 점이 넘는다고 한다. 현재 규슈는 세계에서 유명한 도자기 생산지가 되었으며, 아리타를 부흥시킨 조선의 대표적인 사기장은 이삼평이다. 일본에서 이삼평은 '도조'라 불리며 아리타 도잔 신사에 신으로 모셔져 있으며, 매년 5월에는 이삼평의 공을 기리는 도조제가 개최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사기장들이 모두 이삼평처럼 대접받지 못했다. 이들은 굶주림과 병마와 싸우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 나갔고,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당했으며, 명절 때마다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며 고국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도자기 외에도 조선의 책을 다량 훔쳐 갔다. 대학이나 중용 같은 책은 그 값이 2년 치 쌀값 정도로 아주 비쌌는데 임진왜란 이후 왕세자가 공부할 책이 없어 선비들에게 책을 빌려 읽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이 조선의 책을 가져간 이유는 16세기 후반까지 일본은 끊임없이 내전이 일어났는데, 내전으로 소실된 책을 조선에서 훔쳐 보충하려했다. 궁궐과 양반 집 등 모조리 긁어모아 약 10만 권을 약탈해갔는데 당시 약탈당한 조선의 책은 고려사절요,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유학, 불교, 문집 등 종류가 다양했다. 글을 모르던 왜군들이 어떤 책을 가져가야 할지 선별하지 못하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높은 학식을 가진 승려들을 통해 계획적으로 조선의 문화재와 살아있는 지식인 조선의 선비들까지 약탈해간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출판문화의 발달로 보급된 일본 교육기관 데라코야를 시작으로, 세계 도자기 시장을 장악하였으며, 조선의 기술 유입으로 각종 제조술이 발달한다. 그러나 이에 반해 조선은 기술은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었으며, 기술과 문화 인력의 심각한 손실을 보았다. 임진왜란은 죽고 죽이는 싸움이 아닌 일본이 조선의 문화를 훔쳐 간 문화 전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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