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과 김춘추 백제 신라의 역사

2023. 7. 10. 15:06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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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과 삼천궁녀

660년 7월, 700년의 백제 왕조가 멸망하였다.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은 여인에 빠져 삼천명의 궁녀를 거느리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의 멸망을 부른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와전된 기록이라고 한다. 사실 백제에는 삼천 명이나 되는 궁녀가 없었다. 7세기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 거주했던 인구는 약 5~6만 명. 전체 인구 중 1/20에 해당하는 삼천 명이 궁녀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마 삼천이라는 숫자는 단지 많다는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 

 

의자왕은 옳을 의, 사랑 자로 의롭고 자비로운 왕이란 뜻이다. 왕은 본래 본명과 후대에 불리는 시호가 다른데 의자왕은 본명이 의자이다. 의자왕이 백제의 마지막 왕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 후 이름을 지어줄 신하가 없어 본명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의자왕은 왜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되었을까? 

동맹에서 철천지원수로, 백제와 신라

641년 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영토를 맞대고 확장을 위해 싸우던 혼돈의 시대였다. 백제가 특히 경계한 나라는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던 신라이다. 의자왕은 왕으로 즉위한 후 신라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직접 전장에 나섰다. 의자왕은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키며 신라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평생 함락한 백제의 성이 64개인데, 진두지휘한 첫 전투에서 1여 년 만에 신라의 40여 개 성을 함락시킨 의자왕의 기세는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백제가 유독 신라만 공격한 까닭은 지리적으로 맞닿아 있는 이유도 있지만, 대대로 내려온 복수심이 있었다. 무려 4대조부터 이어진 원한의 원인은 바로 나제동맹이다. 의자왕 재위 200여 년 전, 신라와 백제는 공공의 적인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그렇게 백제의 성왕, 신라의 진흥왕 시기에는 나제동맹덕에 고구려를 밀어내고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라가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기 위해 백제를 배신하며 120년간의 이어온 동맹은 깨지고, 두 나라는 둘도 없는 원수가 된다. 백제의 성왕은 복수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직접 신라로 진격하는데, 매복해있던 신라군에게 당하며 성왕은 참수형에 당한다. 신라는 죽은 성왕의 머리를 신라 궁궐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궁궐 앞에 성왕의 머리를 묻어 그 위를 계속해서 밟고 다니게 할 목적이었다. 이 일은 백제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치욕으로 기억되는데 특히나 이 참극을 잊을 수 없던 이가 성왕의 후손인 의자왕이었다.

의자왕의 출생의 비밀?

의자왕은 백제 무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군사적 재능과 적장자인 왕위 적통성까지 지녔지만, 아버지인 무왕이 즉위하고 태자로 책봉되는데 33년이 걸렸다. 왕이 즉위한 후 일반적으로 3~4년 내 태자를 책봉하는 데 33년이 걸렸다는 것은 의자왕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태자의 자질을 의심받은 것이다. 훌륭한 성품과 적통성에도 그가 태자로 책봉되지 못한 이유는 의자왕은 출생의 비밀 때문이었다.  

 

<서동요>

마 캐는 서동이라는 백제 소년은 신라 왕의 셋째 딸이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찾기 위해 신라로 넘어간다. 그는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두고 맛둥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고 다니게 했다. 서동이 거짓으로 선화 공주와의 염문설을 퍼뜨리자, 결국 신라 왕실에도 소문이 퍼지며 선화 공주는 쫓겨난다. 갈 곳 없는 선화 공주는 소문의 주인공인 서동을 찾아가고 둘은 결혼하게 된다.

 

여기서 서동은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이다. 즉, 신라의 선화 공주가 의자왕의 어머니인 것이다. 의자왕은 신라 출신의 어머니를 두었기 때문에 태자로 책봉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의자왕의 태자 책봉을 사탁왕후가 방해했다. 의자왕이 장성한 뒤 무왕은 사탁왕후를 새로운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사탁가문은 백제의 대표적 귀족 가문으로서 사탁왕후에게는 아끼던 아들이 하나 있었다. 사탁왕후는 자기 아들을 태자로 올리고 싶어 의자 왕자의 태자 책봉을 막은 것이다. 그렇게 30여 년 동안 견제받으며 태자의 자질을 의심받던 의자왕은 태자로 책봉된 후 9년 뒤, 40대 중반의 나이에 드디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의자왕은 즉위하고 1년 4개월 만에 신라의 40여 개의 성을 빼앗으며 저돌적으로 신라를 공격한다. 다음 목표는 신라의 대야성은 두 나라의 경계에 있던 지역이었는데 신라 수도인 경주로 향하는 길목에 있어 빠르게 수도로 진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신라 역시 대야성을 지키기 위해 김품석을 성주로 두어 공격에 대비했는데, 너무나 쉽게 백제가 승리해 버린다. 왜냐하면 백제를 도운 신라의 첩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주인 김품석이 신라 장수인 검일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자 앙심을 품은 검일이 백제군과 내통하여 대야성의 식량 창고를 일러준 것이다. 백제군이 검일이 알려준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르자 신라군은 며칠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고 만다. 의자왕은 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를 바로 처형했는데 김품석과 그의 아내가 신라의 최고 권력자인 김춘추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춘추는 신라 진골 신분의 왕족이자 당시 실권력자였는데, 김품석은 김춘추의 사위였고, 그의 아내는 김춘추의 딸이었다. 의자왕은 김춘추의 딸과 사위의 유골을 성왕이 겪었던 치욕처럼 백제의 감옥에 묻은 뒤 죄수들이 이를 밟고 다니게 만든다.

나당연합의 등장

의자왕은 선대의 복수에 성공했지만, 김춘추는 사위와 딸을 동시에 잃으며 또 다른 원한을 품게 된다. 백제를 향한 복수가 간절했을 김춘추는 당시 백제보다 신라의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외교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평화협정을 제안하고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데 고구려가 군사 지원을 위해선 한강 유역을 반납하라고 하자 고구려와 동맹을 포기하고 당나라로 향한다.  

 

당나라는 백제와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지냈지만 고구려와의 관계 때문에 신라와 연합을 맺는다. 당시 당 태종은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한 안시성 전투에서 패한 후였는데, 백제의 멸망에 협조해 준다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신라가 힘을 보태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연합이 생겨나게 된다. 

 

의자왕은 신라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성왕의 복수까지 끝내자 처음 즉위했을 때와 태도가 달라진다. 의자왕 즉위 15년 후 의자왕을 견제했던 강한 세력인 사탁왕후가 사망한다. 의자왕은 사탁왕후가 죽자 사탁왕후의 가족과 측근 세력까지 모두 추방해 버린다. 그렇게 자신의 견제 세력이 모두 사라지자 의자왕은 사치와 향락에 빠지며 정사를 외면한다. 또한, 의자왕은 왕비인 은고에게 휘둘렸는데 은고가 백제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며 의자왕은 태자였던 융을 폐위한 후 은고의 아들 효를 태자로 올린다.

 

의자왕의 이런 행실에 고위 관료였던 성충이 이제는 멈추라며 의자왕에게 간청하는데 의자왕은 성충을 감옥에 가두고는 음식도 주지 않았다. 충신 성충은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나라를 걱정하며 감옥 안에서 상소문을 써 내려간다. 성충은 틀림없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말하며 신라와 당나라의 움직임이 수상하니 조심해야 한다고 간절히 간청했는데 의자왕은 성충의 마지막 유언조차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 결국 성충은 감옥에서 굶어 죽는다.

 

백제의 빈틈을 기다렸던 김춘추는 마침내 신라의 실권자에서 신라 제29대 왕 태종무열왕이 된다. 나당 연합을 맺고 12년만, 딸이 죽은 후 18년 만에 김춘추는 18만 대군인 나당 연합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한다.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의 인구 6만의 3배가 되는 규모였다. 그런데 나당 연합군의 침입 경로가 죽은 성충의 상소문에 있던 침입 경로 예측과 동일했다고 한다. 바다를 통해 기벌포로 오고 있는 당나라와 육로를 통해 탄현으로 들어오는 신라. 양쪽으로 침입하여 빠르게 수도를 공격하려는 작전이었다. 수도를 지키기 위한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건 전투가 황산벌 전투이다. 황산벌 전투는 5만 명의 신라군과 5천 명의 백제군이 맞붙었는데 백제는 수적인 열세로 결국 신라에 패하고 만다. 황산벌을 뚫은 신라군은 기벌포로 들어온 당나라 군과 만나 18만 대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포위한다. 의자왕은 결국 항복하였고 김춘추의 승전 축하연에서 상석에 앉은 김춘추와 바닥에 무릎 꿇은 의자왕의 모습으로 만나게 된다. 술 한 잔 따라보시게라는 김춘추의 말에 의자왕은 고개를 숙인 채 술을 따라야만 하는 치욕을 겪는다. 이렇게 의자왕은 당나라의 수도로 끌려가 60대 후반의 나이로 병에 걸려 사망하고 백제는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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