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10. 13:30ㆍ한국사
1896년 2월 11일, 조선의 왕인 고종과 왕세자는 일본군을 피해 러시아 공관으로 향한다. 왜 그들은 조국인 조선 땅을 벗어나 러시아로 향해야 했을까?
*아관파천 :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세자가 일본군의 위협을 피해 1년 넘게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간 사건
*파천 : 왕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일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이유
1894년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쟁이 발발한다. 이 청일전쟁의 승자가 된 일본은 1894년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고 청일전쟁 이후에는 조선의 내정까지 간섭하며 영향력을 뻗친다. 일본의 극심한 내정 간섭으로 고종의 숨통이 조여가던 그때, 경복궁에서는 명성황후가 시해당한다. 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여야 했을까?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려 했는데 일본이 이를 알게 되어 러시아의 개입을 막고자 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이다. 조선은 갈수록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 간섭을 피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조선은 가장 먼저 미국을 끌여들이려 하였으나, 당시 외교에는 관심을 두지 않던 미국에는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그렇게 인접한 나라 중 가장 군사력이 강한 러시아를 택했다. 일본은 을미사변 이후 고종을 궁에 가두고 궁궐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며 감시했다. 매일 죽음의 공포에 떨며 잠을 자지도, 밥을 먹지도 못한 고종은 결국 조국을 뒤로하고 러시아로 떠난다.
을비사변 :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 등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칼로 찌르고 불태워 시해한 사건
*청일전쟁(1894~1895) 조선의 지배를 두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
고종의 탈출 소식을 뒤늦게 접한 일본은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의 궁에 주둔하며 감시를 포기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고종은 조선에서 일본군을 몰아낼 방법을 찾던 중, 뜻밖의 기회를 얻게 된다. 러시아의 황제인 리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에 고종이 초청된 것이다. 러시아 황제를 직접 만날 기회가 생기자 고종은 황제 대관식에서 조선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고종은 러시아로 향해 제 뜻을 전달해줄 조선 사절단을 구성한다.
나라의 명운을 건 조선 사절단
조선 사절단을 이끌 수장은 민영환이었다.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집안이자 고종의 외가 친척인 여흥 민씨 가문으로, 17살에 과거에 급제한 비상한 머리와 조정 진출 이후에도 초고속 승진을 하며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역임한 인재였다. 게다가 국제 정세도 밝은 민영환을 고종은 사절단에 적임이라 생각하여 특명전권공사 직함을 내리고 외교의 전권을 부여한다. 그렇게 민영환을 주축으로 한 외교 사절단은 수석수행원 윤치호, 기록 김득련, 러시아어 통역 김도일, 민영환 개인비서 손희영까지 5명으로 구성되었다. 민영환은 고종이 절박한 심정으로 써 내려간 문서를 러시아 황제에게 전달하고, 조선이 필요한 요구를 협상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다.
조선 사절단의 첫 번째 미션은 1896년 4월 1일에 시작된다. 니콜라이 2세 대관식은 5월 26일로 두 달여 간의 기간에 무사히 모스크바에 도착해야 한다. 당시에는 비행기가 없었기 때문에 민영환과 조선 사절단은 모스크바까지 배와 기차를 이용한 약 40일 정도의 최단 거리 여정을 선택했다. 4월 1일 인천항에서 러시아가 제공한 군함 그레먀시호에 오르며 그렇게 4월 4일, 그들은 첫 번째 경유지인 상하이에 도착한다. 그러나 상하이에 예상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사절단은 타야 할 다음 배의 표를 구하지 못한다. 수소문 끝에 다행히 다른 배편을 구했지만, 이는 초기 계획과 정반대 방향으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일정이라 소요 기간이 약 50일로 늘어난다.
두 바다를 건너 우여곡절 끝에 조선 사절단은 대관식을 6일 남기고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조선의 사절단으로서 니콜라이 2세의 방에 도착한 민영환은 떨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고종의 편지를 전달한다. 편지에는 자신 대신 방문한 민영환을 특별대우해주고, 그를 믿고 우리의 요구 사항을 들어달라는 고종의 간절한 부탁이 담겨있었다. 친서를 받은 니콜라이 황제는 민영환에게 별다른 말 없이 "모스크바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렸는가?"라고 첫 질문을 하였다. 조선의 미래가 걸린 중대한 임무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던 민영환은 니콜라이 황제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려 애썼지만, 니콜라이 황제는 "잘 알겠다"라고 하며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갈 수 없게 만든다.
황제의 태도에 구체적인 요구 사항은 꺼내지도 못하고 시간은 흘러 5월 26일 니콜라이 2세 대관식의 날이 된다. 이 대관식에는 각국의 외교관들이 축하를 위해 참석했는데 그중에는 일본의 외교관도 있었다. 대관식 이후 6월 초, 민영환은 당시 외교를 담당하던 외무대신인 알렉세이 로바노프를 만나게 된다. 민영환은 외무대신에게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며 다섯 가지 사항을 요구했는데 이를 들은 외무대신은 황제의 승낙이 필요하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는다. 그럼 황제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으로 민영환은 러시아에서 두 번째 황제와의 만남을 가진다. 외무대신에게 말했던 것처럼 황제에게 다시 조선의 상황과 다섯 가지 요구 사항을 간곡하게 부탁한다. 민영환의 말을 들은 황제는 "우리의 도움을 믿어도 될 것입니다."라고 답하며 민영환은 노력을 빛을 보는듯 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공식 문서를 기다리던 민영환은 시간이 지나도 러시아의 답변을 받지 못했다.
<조선의 5가지 요구 사항>
1. 조선 군대가 신뢰할 만한 병력으로 훈련될 때까지 국왕 보호를 위한 경비병을 제공
2. 러시아 군사교관을 제공
3. 각 분야의 고문관을 제공
4. 조선과 러시아 두 나라에이익이 되는 전신선의 연결, 전신 전문가 1인 제공
5. 일본 빚을 청산하기 위한 300만엔 가량의 차관 제공
조선은 러시아에게 고종의 환궁을 위한 군사지원을 요청하고, 당시 체계적이고 강한 군을 이룬 러시아처럼 조선에서 군을 육성할 계획이었다. 또한 근대화를 위한 내각. 철도 등의 전문가 파견과, 일본의 빚을 모두 청산하기 위한 300만 엔(당시 조선의 1년 예산의 절반 가량)을 요구하였다.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열리던 날, 각 나라의 사절단은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조선이 러시아에 일본군을 내쫓을 도움을 청하러 온 것처럼 일본은 러시아와 일본이 함께 조선을 남과 북으로 나눠 보호 통치하길 바랐고, 청나라는 러시아와 동맹으로 일본을 견제하길 바랐다. 당시 일본이 러시아에 외교 교섭을 벌인 것이 모스크바 의정서이다. 모스크바 의정서에는 조선의 질서가 문란해질 경우 러-일은 자국민 보호를 위한 군대를 각기 파견한다는 내용이 있다. 러시아는 조선을 돕는 것이 아닌 일본과 조선을 나눠 가지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를 알 리 없는 민영환은 하염없이 기다리다 다시 외무대신을 찾아간다. 외무대신은 첫 만남에서와 달리 조선에 경비병을 파견하는 것을 딱 잘라 거절한다. 그렇게 러시아 체류 42일째, 드디어 민영환에게 러시아의 공식 문서가 도착한다. '조선 국왕은 원하는 한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 수 있다. 만약 고종이 환궁할 경우 러시아 정부는 안전에 대해 도덕적 보장을 제공하겠다.'라는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로 군사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은 민영환은 매우 낙담하였다. 하지만 이대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던 민영환은 작별 인사를 빌미로 다시 황제를 찾아간다. 황제와의 세 번째 만남에도 별 소득 없이 끝나자 외무대신을 끈질기게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러시아 체류 86일째, 민영환은 외무대신으로부터 마지막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조선 정부에 어려움이 있거나 또는 다른 나라가 자주권을 침해하는 일이 있다면, 러시아는 당연히 공평하게 처리하여 도울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시 러시아가 돕겠다고 정확히 문서에 명시한 것이다. 러시아의 군사적 도움을 확인한 후 드디어 사절단은 조선으로 복귀한다. 사절단이 귀국 후 러시아는 대령급 군사교관 단장 및 장교, 하사관 총 14명을 조선에 파견했으며, 고종은 민영환을 군부대신(국방부 장관)에 임명하고 러시아 교관을 통해 궁궐 호위병을 양성한다. 조선의 군대는 점차 궁궐 경비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1897년 2월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다.
조선으로 돌아온 고종은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들기 위해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로 즉위한다.
군사적 불가침을 위해 중립국화를 추진하며 중립국 프로젝트 1단계, 주변 강대국의 동의를 받기 위해 특사를 파견한다. 하지만 일본이 이를 막아서며 1단계는 실패한다. 그래서 고종은 2단계로 국제 조약에 가입을 위해 국제적십자사회의 참여를 추진한다. 국제기구의 가입은 곧 독립국으로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었는데, 국제적십자사회의 가입을 타진하고 1년 후 가입에 성공하였다. 국제회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조선은 중립국이 되기 위해 노력했는데, 1904년 2월 일본이 한반도를 독점하기 위해 러시아를 기습하는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일본과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1년간 전쟁을 벌였는데 그 승자는 일본이 되었다. 을사늑약을 통한 외교권 박탈로 일본의 간접 통치하에 들어간 대한제국은 정치, 사회적 모든 분야에 일본의 간섭을 받게 되는 결말을 맞는다. 조선을 위해 절실히 노력했던 민영환은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지만, 친일파 대신들의 반대와 일본군의 진압에 무력해지며 울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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