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을 택한 이유

2023. 12. 24. 16:00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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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집안 배경

안중근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무인 가문이었다. 안중근 역시 공부보단 말타기와 사냥에 능했으며 특히 사격 솜씨는 일품이었다고 한다. 1894년 16세에 황해도 양반 가문의 김아려와 혼인한 안중근은 그 해 조선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참전한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황해도 지방관리의 요청으로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섰고 아들인 안중근 또한 진압군으로서 전투에 참여했다. 그 시절 안중근은 동학농민운동을 반란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이 끝나고 농민군의 곡식을 군량미로 사용한 안태훈을 관료들이 반역죄로 몰아세우자 프랑스인 신부들이 거주하는 치외법권 지역인 성당으로 피신한다. 안태훈은 성당에 머물며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가족들에게 천주도 교리를 전파하며 안중근도 천주교 신자가 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사상을 배우며 안중근은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이는 이후 안중근의 호 '도마'의 근원이 된다.  

 

항일을 위한 망명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안중근은 일제에 저항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국내는 일제의 군대가 주둔해 있어 해외로 이주를 결심하고 중국 상해에 한국인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아버지에게 상해로 이사 갈 것을 제안한다. 아버지 안태훈이 흔쾌히 동의하자 안중근은 답사를 위해 홀로 상해로 떠났고 상해 동포들을 찾아다니며 구국 활동에 나설 것을 설득한다. 하지만 동포들의 외면에 안중근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 안태훈은 이미 사망한 후였다. 자신의 뜻을 가장 잘 이해했던 아버지의 죽음에 안중근은 좌절했지만,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독립운동에만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1906년 안중근의 가족은 진남포로 향했는데 진남포는 활발한 무역이 이뤄지는 번성한 항구도시였다. 해외 항일운동을 염두에 두고 항구와 가까운 진남포를 선택한 안중근은 항일운동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한다. 학교 운영에 필요한 자금은 집안의 논과 밭을 팔아 마련했는데 안중근의 가족 전체가 국가적 위기 상황 속 '학교'를 통해 사회적 기여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안중근의 학교에서는 군사훈련과 영어를 가르쳤는데 항일운동의 씨앗은 교육을 통한 계몽이라 본 안중근은 애국계몽운동을 가족들과 함께 펼쳐나간다. 하지만 1년 정도 교장으로 활동하던 안중근은 일제가 황제 고종을 강제로 폐위하고 대한 제국의 군대까지 해산시키자 소극적인 애국계몽운동에 한계를 느끼며 무장투쟁을 결심한다.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위해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29살의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안중근은 함께할 동료들을 모으기 위해 신문에 글을 실었고 기고문을 본 연해주 동포들이 모여든다. 안중근이 의병 참모 중장으로 이뤄진 연해주 항일 의군부대가 조직되고 소규모의 일본군을 상대로 기습공격하여 함경북도 홍의동과 신아산의 두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다시 한번의 결의

두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영산에서 벌어진 세 번째 전투에서 안중근의 의군부대는 300명 중 20여 명만 살아남는 참패를 당한다. 참패의 원인은 풀어준 전쟁 포로들에 의해 안중근 의군부대 위치가 탄로 난 것이었다. 앞선 전쟁에서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포로로 잡게 되어 의병부대는 이들을 사살하려 했지만, 안중근이 이를 말렸다. 안중근은 만국공법(국제법) 상 전쟁포로를 인도해야 한다는 규정과 천주교의 박애주의를 지키기 위해 포로를 석방한 것이었다. 석방된 포로들은 일본군에게 의병대의 위치를 알렸고 사실상 의병부대가 전멸된 안중근은 출병 한 달 반 만에 연해주 본진으로 귀환했다. 돌아온 안중근을 향한 연해주 동포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안중근의 포로 석방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상황에서 안중근은 재기를 꿈꾸며 다시 연해주 동포들을 설득한다. 어렵게 11명의 동료를 다시 모으게 된 안중근은 단지동맹을 통해 손가락을 잘라 결의를 다진다.  

 

결전의 날

 1910년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에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향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하얼빈에서 한반도와 만주 문제를 협의하고자 이토가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안중근은 하얼빈에 미리 도착해 이토의 도착 시간 정보를 수집하였고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이토가 탄 기차가 들어온다. 열차 안에서 러시아 대표와 30분간 이야기를 마치고 내린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은 정확히 피격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총에 맞은 지 30분 만에 사망한다. 안중근은 피격 후 대한 만세를 외치며 순순히 체포에 응하였고 그는 포승줄에 묶인 채 의연히 걸어 나간다. 

 

안중근의 재판 

안중근은 하얼빈과 900km 떨어진 뤼순 감옥에 수감된다. 러청 조약으로 하얼빈 일대 철도 부설권을 러시아가 차지하며 하얼빈은 본래 중국 땅이지만 실질적으로 러시아 통치하에 있었다. 안중근은 러시아 통치 구역인 하얼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러시아의 재판을 받는 게 원칙이지만, 하얼빈 역의 경비를 맡았던 러시아도 이토의 사망에 책임이 있으므로 일제의 요구에 따라 안중근의 재판권을 일본에 넘겨버린다. 일본의 통치권이었던 뤼순으로 옮겨져 감옥에 수감된 안중근은 마음대로 변호사도 선임할 수 없었고, 영국과 러시아 변호사가 안중근을 변호하겠다고 나섰지만 이마저도 일본에 막힌다. 안중근의 가족들은 수감된 안중근의 소식을 듣게 되고 안중근의 두 남동생 정근과 공근은 옥바라지를 위해 뤼순 감옥으로 향한다. 

 

안중근은 첫 공개 재판에서 '나는 한국 의병의 참모 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하여 이토를 죽였고, 또 참모 중장으로서 계획한 것인데 이 법원 공판장에서 심문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주장하며 의병으로서 독립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을 국제법으로 대우해 달라'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사망하여 전 세계가 주목하는 공판에서 안중근은 대한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려 했다. 조선과 일본의 상황이 알려지길 원치 않았던 일본은 안중근의 발언에 방청객을 퇴장시키고 비공개로 재판을 진행한다. 첫 재판 일주일 뒤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다. 안중근은 사형 집행일을 미뤄달라 청하는데 그는 남은 기간 동양 평화론을 집필한다. 안중근이 말하는 동양 평화론은 청, 대한제국, 일본 동아시아 3국이 서로 주권을 인정하고 국제기구를 만들어 협력하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17페이지 분량으로 끝내 마무리되지 못한다.

 

안중근은 죽기 전 두 동생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 해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일제는 사형 집행 후 안중근의 시신을 가족의 동의 없이 뤼순 감옥 어딘가 묻어버리고 두 동생은 안중근의 시신을 끝내 넘겨받지 못한다. 안중근은 거사 전 마지막으로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가족들이 의거 이후에 도착하여 끝내 만나지 못한다. 안중근의 죽음 이후 안중근의 아내와 아이들은 연해주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조국에 있던 안중근 어머니와 동생 가족들은 헌병과 순사들이 매일 찾아오고 출입자들을 탐문하며 늘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결국 조국에 남아있던 가족들 역시 망명길에 오르고 해외 한인사회에서는 안중근 가족을 돕기 위해 모금 운동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중근의 두 남동생은 이후 형의 의지를 이어 나갔다. 안정근은 중국 상해에서 도산 안창호와 함께 상해 임시정부 의원으로 활동하며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나서기도 한다. 막내 안공근은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오른팔로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활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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