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24. 12:48ㆍ한국사
홍범도의 어린 시절
조선 말기 태어난 홍범도는 모친이 출산 후유증으로 7일 만에 사망하여 아버지가 젖동냥으로 키웠다. 홍범도가 9살이 되던 해 머슴이었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홍범도 역시 머슴살이로 생계를 이어간다. 어느 날 홍범도는 평양 관청에서 군인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머슴살이보단 군 생활이 낫다고 생각하여 15살 나이에 입대 최소 나이인 17세로 속여 군에 입대한다. 애국심보다 생계를 위한 입대였지만 그는 군대에서 사격과 제식 훈련에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한양의 파견 근무에 선발되기도 한다. 홍범도는 190cm의 남다른 신체 조건과 사격술을 가진 뛰어난 군인이었지만 장교들의 가혹 행위로 군 생활에 회의를 느낀다. 결국 홍범도는 병사들을 괴롭히던 장교를 때려눕히며 장교를 때린 하극상으로 처벌이 불가피해지자 4년 간의 군 생활을 접고 도망친다. 탈영 후 그는 제지소에서 근무했는데 주인이 임금도 제때 주지 않고 폭력까지 쓰자 결국 3년 만에 제지소마저 떠나게 된다. 이후 홍범도는 강원도의 신계사를 찾아가 절에서 생활하는데 여기서 단양 이씨와 사랑에 빠지며 이씨의 고향인 함경북도 북청군으로 거처를 옮긴다.
사냥꾼 홍범도
북청군으로 거처를 옮긴 홍범도가 선택한 직업은 사냥꾼이었다. 3면이 산악지대로 둘러싸인 북청군은 맹수들의 서식지로 유명했다. 홍범도의 사냥 실력은 좁은 유리병 입구로 총알을 통과시킬 정도로 훌륭했다고 한다. 근방 포수들은 홍범도와 조를 이루고 싶어 했고 홍범도는 포수들의 대장이 되며 북청군 일대 대표 사냥꾼이 된다. 늘 생계를 걱정했던 홍범도는 북청도에서 가족들과 행복한 삶을 꾸릴 수 있었다. 그런데 1907년, 일제가 황제였던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며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난다. 일제는 의병 진압을 위해 조선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총을 모두 압수하는데 홍범도는 사냥꾼이 총을 뺏겨 굶어 죽느니 일본과 싸우겠다고 결심한다. 홍범도는 뜻을 모은 포수들과 함께 산포수 의병부대로 이름 짓고 북청군 근처 일본군이 자주 출몰하는 후치령에서 일본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홍범도의 의병부대
홍범도의 의병부대는 후치령에서 적을 기습 공격하는 게릴라 전술을 이용하여 첫 승리를 거둔다. 심지어 습격한 일본군들이 빼앗은 조선인들의 총을 그대로 되찾았으며, 일본군의 신식 무기와 장비로 무장을 강화한다. 하지만 후치령의 의병부대 존재를 알게 된 일본은 수비대 60여 명을 후치령으로 보낸다. 처음으로 다수의 일본군과 싸우게 된 홍범도와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화력이 월등했음에도 익숙한 산악 지대를 이용하여 완벽한 승리를 이뤄낸다. 그리고 이어진 60전 60승의 연전연승 신화로 홍범도는 '나르는 홍범도'라 불리게 된다.
홍범도의 위기
홍범도에게 연달아 패배한 일본은 홍범도를 잡기 위해 그의 가족들을 납치한다. 홍범도의 아내는 남편을 회유하는 편지를 쓰도록 고문과 협박을 받았지만 끝까지 응하지 않고 버티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숨을 거둔다. 이후 일제는 홍범도의 큰아들에게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써 홍범도에게 가져가게 시키고 귀순 청원 편지를 가지고 온 아들을 본 홍범도는 아들에게 총구를 겨누며 일제의 회유를 거부한다. 아버지의 뜻을 이해한 큰아들 홍양순은 이후 아버지와 함께 일본군과 싸우는데 일본군과 전투 중에 사망한다. 아내와 큰아들을 잃은 홍범도에게 일본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한 적이 아닌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홍범도는 가족의 죽음 이후 항일 운동에 더욱 몰두한다. 하지만 일본의 의병에 대한 탄압이 갈수록 심해져 결국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향한다. 홍범도는 러시아에서 의병을 도울 기회를 찾으려 했는데, 러시아는 일본과 외교 마찰을 우려하여 독립운동을 감시하는 상황이라 쉽지 않았다. 그렇게 조선은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빼앗긴다. 그로부터 10년 후 1919년, 조선에서 3.1 운동 소식이 들려온다. 한반도 전역에 울려 퍼진 독립의 소리는 만주와 연해주까지 들려오고 홍범도는 연해주에 모인 의병들로 독립군을 결성한다. 그의 나이는 52세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독립군의 대장이 된 홍범도는 300여 명의 대한독립군 대장이 되어 다시 북간도로 향한다.
독립군 대장 홍범도의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
당시 북간도에는 독립운동단체가 많았는데 홍범도는 하나의 큰 군대를 만들고자 6개의 단체를 연합한다. 결성된 독립군 연합부대는 '대한북로독군부'로 이름 짓고 홍범도는 총인원 700여 명의 연합부대 대장이 된다. 독립군들이 선택한 새로운 근거지는 봉오동이었다. 일본은 독립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300명 규모의 정예부대인 월강 추격대대를 봉오동으로 보낸다. 홍범도의 연합 독립군은 도망가는 척 월강 추격대대를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사방을 포위한 뒤 무차별 사격을 퍼붓는 전술을 펼친다. 기상 악화로 독립군의 공격이 중단되자 궁지에 몰렸던 일본군은 이 기회를 노려 도망치는데 양방향으로 도망치던 일본군은 아군을 독립군으로 착각하고 공격할 정도로 어디서 공격할지 예측할 수 없는 독립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국내외 조선인들에게 봉오동의 승전보가 날아들었지만 기쁨도 잠시 복수를 위해 엄청난 수의 일본군이 다시 북간도로 다가온다. 당시 일본군의 수는 무려 2만 명으로 일본 정부차원에서 본격적인 북간도 공격을 작정한 수준이었다. 일본의 총공세에 맞선 홍범도는 근거지를 조선땅과 더 가까운 백두산 근처로 옮겨 전투를 계획한다. 독립군의 움직임을 알아챈 일본군이 맹추격하자 홍범도는 습격받을 위험성을 생각하여 청산리로 계획을 바꿔 전투를 준비한다.
청산리 일대는 북쪽 산악지대로 10월이라 이미 눈이 많이 쌓인 상태였다. 홍범도 부대는 청산리의 강추위를 짚신 하나로 버티며 매복을 위해 산 정상으로 오른다. 일본군은 산 정상의 독립군을 노리며 양쪽에서 포위망을 좁혀온다. 하지만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을 산 정상으로 유인하고 이미 산을 빠져나간 후였고 그 사실을 몰랐던 일본군은 아군을 독립군으로 착각하여 사격한다. 홍범도의 철저한 계산으로 만들어낸 청산리에서의 오인 사격은 완루구전투이다. 하산하던 중 김좌진 부대의 전투를 목격한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의 뒤에서 기습하며 도왔고 일본군은 독립군에 패배하고 달아난다. 이는 어랑촌 전투로 청산리 일대에서는 6일 동안 10여 번의 전투가 이뤄졌는데 이를 통틀어 청산리 전투라고 하며 독립군은 10전 10승의 완승을 거둔다.
홍범도의 마지막
하지만 일본군은 북간도 지역의 독립군 섬멸 계획이 계속 실패하자 북간도의 조선 민간인을 학살한다. 간도의 마을을 습격하여 시체를 재가 될 때까지 태워 누구의 시신인지 조자 알 수 없었다. 간도참변 이후 홍범도는 러시아의 모스크바로 향해 러시아 내전에 참전하여 러시아의 원조를 받으려 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거절한다. 심지어 함께 간 독립군들 마저 분열되어 홍범도는 소련에 남아 농사를 지으며 군자금을 모은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일본의 간첩활동 방지를 위해 일본인과 닮았다는 이유로 고려인을 강제로 이주시킨다. 홍범도는 17만여 명의 고려인들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하여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감한다. 홍범도는 서거 후 78년 만인 2021년 대한민국으로 돌아온다. 그의 유해는 공로를 기리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정부는 최고 등급의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서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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