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이봉창, 도쿄에서 폭탄을 던진 이유

2024. 2. 9. 23:19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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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의 집안

 

이봉창은 1901년 8월 경성에서 태어났다. 사업으로 부유했던 이봉창 집안은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보유한 집과 땅 대부분을 잃게 된다. 일제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인들은 가진 땅을 모두 신고해야 했는데, 신고 방법이 복잡해 땅을 포기하거나 일본인들에게 사기를 당하였다. 이봉창의 아버지도 토지 신고를 도와주겠다는 한 일본인을 믿고 집문서를 넘기는 바람에 모든 것을 잃고 산동네로 이사한다. 당시 15살이던 이봉창은 어려워진 집안 형편에 학업을 포기하고 생업에 뛰어든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과자점과 약국에서 일하며 이봉창은 탁월한 사교성과 뛰어난 일본어 실력으로 조선인이라 말하지 않으면 일본인처럼 보였다.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이봉창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진다. 이봉창은 생계를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일하던 약국보다 월급을 3배를 준다는 기차 연결수 일을 시작한다. 이봉창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회사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승진이 누락되고, 업무양은 갈수록 과도해진다. 하지만 이봉창은 차별에 대한 반발심 보다 일본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안타까움이 더 컸다. 노력으로 차별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이봉창은 이전보다 더욱 열심히 일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자 상실감에 유흥에 빠진다. 순식간에 큰 빚이 생기자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해 일본행을 택한다. 일본 본토에서는 오히려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3·1 운동으로 조선인의 일본 입국이 쉽지 않았지만 같이 일하던 동료의 신분 보증과 돈으로 이봉창은 1925년 11월 오사카에 도착한다.

 

이봉창은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직장을 얻고 밤에는 공부하였다. 고생으로 영양실조에 걸렸지만 인생 통틀어 가장 많은 임금을 받게된 이봉창은 부두에서 석탄 나르는 일용식을 시작한다. 다른 조선인들보다 일당이 3배였던 이봉창은 만족감을 느끼며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봉창을 일본 사람으로 오해해 일본인 임금을 준 것으로 조선인이 밝혀지자 임금이 삭감된다. 일본 본토에서도 피할 수 없었던 조선인에 대한 차별. 계속된 차별 대우에도 이봉창은 여전히 일본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이 완벽한 일본인이 아닌 것에 자책하였다. 이봉창은 자신을 신일본인이라고 칭하며 조선인이 새로운 일본인으로 받아들여질 거라 믿고 있었다.  

 

1928년 11월 교토에서 일왕의 즉위식이 열린다는 소식에 이봉창은 일왕을 보러간다. 일왕과의 만남으로 완전한 일본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즉위식  3일 전에 도착하여 참관석 앞줄에 미리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행인을 검문하던 일본 경찰은 이봉창을 연행한다. 당시 이봉창은 면도칼과 수건, 고향 친구가 준 안부 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편지에 한글이 적혀 있다는 이유로 그를 체포한 것이다. 이봉창은 간곡하게 천왕 폐하를 뵐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즉위식 날까지 잡혀있어 일왕을 만나지 못한다.

 

유치장에서 풀려나 오사카로 돌아온 이봉창은 조선인 노동자로서 받은 차별과 교토에서의 부당한 체포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정말 일본인처럼 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이 알려질까 알고 지내던 조선인들과 가족들 모두 인연을 끊고, 편지도 하지 않고 일본 이름을 쓰며 진짜 일본인 행세를 했다.

상하이로 떠난 이유

 

비누 가게에서 조선인임을 숨기고 일하던 이봉창은 어느날 가게에 비누를 사러 온 조선인 여인을 만난다. 조선인 여인이 일본어를 못해 우물쭈물하자 가게 주인은 비누를 훔치려는 것이 아니냐며 호통을 치고 쫓아내는데 이를 듣고 있던 이봉창은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한다. 이봉창은 일본인이 되려 한 스스로에게 깊은 회의감을 느끼며 2년 동안 일본인으로 살려고 한 자신의 고통스러운 인생을 돌아보며 이제부터는 떳떳한 조선인으로 살기로 결심한다.  

 

이봉창은 떳떳한 조선인으로 살기위해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활동하는 상하이로 간다. 임시정부를 찾아간 이봉창은 일본인 같은 행동과 말투로 의심받아 임시정부 직원과 다투고 쫓겨날 뻔한다. 그러나 이봉창은 다시 임시정부를 찾아와 자신을 쫓아내려 했던 직원에게 술과 고기를 사며 친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는 독립운동이며 그들과 싸울 이유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이봉창은 임시정부 사람들에게 일왕 암살 작전을 제안한다. 당시에 일왕을 직접 타깃으로 하는 계획은 누구도 제안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이를 문뒤에서 듣고 있던 김구(백정선)는 밤에 몰래 이봉창을 찾아간다. 김구는 아직 이봉창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명을 알려주지 않고 자신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백정선이라고 소개한다. 사실 김구 역시 일왕을 노리고 있었는데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 이봉창의 의지가 진심인지 확인하려 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확고한 독립투쟁 의지를 보이며 김구는 이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조선 독립에 대한 서로의 결의를 확인한 김구와 이봉창은 본격적인 거사 준비를 시작한다. 김구는 일왕 암살을 위한 필수품으로 독립 자금을 받아 어렵게 수류탄 2개를 구한다. 1931년 12월 13일 김구는 이봉창과 함께 한인애국단의 선서식을 열며 이봉창은 제1호 단원이 된다. 1931년 12월 15일 김구는 이봉창에게 수류탄 2개를 건넨다. 하나는 일왕, 하나는 거사를 실패할 경우 자신에게 써야 할 수류탄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거사를 준비해 온 김구와 이봉창. 1931년 12월 17일 이봉창은 마침내 거사 실행을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

 

독립운동가 이봉창

일본에 도착한 이봉창은 1월 8일 일본 육군 관병식장에 일왕이 참석한다는 기사를 보고 '상품은 1월 8일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라'라고 김구에게 편지한다. 하지만 연병장의 객석과 일왕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폭탄을 던지기에는 불가능하였다. 결국 이봉창은 연병장이 아닌 연병장으로 향하는 거리를 노렸다. 소형 버스를 타고 일왕의 행차 노선을 사전 답사하며 특유의 친화력으로 버스 기사와 친해져 관병식에 대한 정보와 도쿄 헌병대 간부의 명함을 받는다. 거사 당일 하라주쿠역에 도착한 이봉창은 너무나 삼엄한 경비에 급히 거사 장소를 바꾼다. 일왕의 동선을 예상하여 요쓰야 쪽으로 이동했지만 이미 일왕은 지나간 후였다. 결국 이봉창은 관병식장으로 향하는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지 못한다.

 

포기하지 않는 이봉창은 이전과 반대로 일왕이 궁으로 돌아갈 때를 노린다. 택시를 타고 겨우 일왕의 행렬을 앞질러 도쿄 경시청에 도착한 이봉창 앞을 일본 경찰이 막아선다. 수류탄 2개를 가지고 있는 이봉창은 순간 기지를 발휘해 버스 기사에게 받았던 일본 헌병대 간부 명함을 보여주며 초대받았다고 하자 다행히 검문을 통과된다. 앞으로 나아간 이봉창 앞에 드디어 마차가 다가왔다. 누군가 홀로 타고 있는 첫 번째 마차 뒤에 호위 무관으로 둘러싸인 두 번째 마차를 보자 그곳에 일왕이 타고 있다고 확신한 이봉창은 수류탄을 던진다. 

 

폭발 소리를 듣고 거사가 성공했음을 확신한 이봉창. 하지만 폭탄의 위력이 약해 마차와 말에 약간의 피해만 줬을 뿐 계획은 실패한다. 심지어 두 번째 마차에 타고 있을 거라 확신했던 일왕은 첫 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다. 거사가 실패한 후 일본 경찰은 이봉창쪽으로 달려와 이봉창 뒤의 다른 남자를 체포하려 한다. 일본 경찰이 범인을 착각한 것이다. 빠져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이봉창은 도망가지 않고 자신이 했다며 당당한 태도로 체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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