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 이완용 조선을 팔아먹은 방법

2023. 12. 16. 14:50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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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엘리트 이완용

이완용은 고종이 신임한 신하이자 조선의 인텔리 중의 인텔리였다. 병자호란 패배 이후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청나라를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고종은 미국과의 교류를 위해 육영공원을 세웠다. 인재 양성을 위한 육영공원은 명문가 자제와 현직 관리 중 선발된 30여 명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 이완용은 29살에 육영공원에 자원 입학하여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주미공사 관원 중 한 명으로 선발된다. 하지만 청나라가 주미 전권공사의 철수를 요구하자 고종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공석이 된 주미 전권공사의 자리는 이완용이 차지한다. 이완용은 미국에서 생활하며 영어 실력은 일취월장하였으며, 미국 공사관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조선으로 돌아온 이완용은 대미 외교 인자로 부상하며 친미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된다. 이완용은 고종의 최측근 기구인 승정원에서 일하며 34살에 종 2품까지 승진하여 조선의 권력자가 된다.  

 

고종의 최측근 이완용

1894년 청일 전쟁에 일본이 승리하며 조선에 간섭이 극심해진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타국의 도움으로 일본을 견제하려 했지만, 이를 알아챈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고종은 일본과 친일파의 감시 속에 경복궁에 갇히고 이완용은 친분이 있던 미국 공사관으로 대피한다. 이완용은 일본의 눈을 피해 고종 구출 작전을 세우지만, 계획이 발각되어 실패한다. 이완용은 고종 구출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 한 야망 있는 인물이었다. 이완용은 미국 선교사와 다시 탈출 계획을 세우고 1896년 두 번째 계획이 성공한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며 아관파천이 성공한 뒤 이완용은 무려 세 개의 직급을 획득한다. 친일파로 익히 알려진 이완용은 이때만 해도 일본에 조선을 지키기 위해 열정을 다했다. 일본이 고종을 계속 압박하며 조선 신문에 궁궐을 떠나 외국 열강에 보호를 요청한 국왕을 폐위해야 한다는 글을 퍼트리자 민심을 달래기 위해 이완용은 신문사에 엄중히 경고하며 일본 공사에 조처하기도 했다.

 

을사오적의 을사늑약

이완용은 1895년 학부대신 시절 해외에 빌린 돈을 빼돌린 일. 1896년 외무대신 시절 미국에 5만 달러를 받고 철도 부설권을 넘긴 일. 1998년 세금 20만 냥 횡령 의혹을 받으며 결국 고종은 이완용을 파직시킨다. 하지만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된 고종은 파면된 이완용을 다시 정계로 복귀시킨다. 러일 전쟁이 발발하며 일본과 러시아 양국의 압력을 받아온 대한제국은 두 나라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전히 미국의 도움을 원했고 결국 이완용을 찾는다. 그런데 이완용은 정계 복귀 3개월 만에 친일파의 반대로 해임되는데 당시 친일파는 이완용을 친러파라 생각하여 고종을 압박해 이완용을 쫓아낸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미국은 필리핀 점령을 인정받는 조건(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인정한다. 일본판이 된 대한제국은 이제 일본에 등을 돌리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상황이 되었다. 이완용은 이하영에게 일본 공사관에 다리 좀 놓아달라고 부탁하며 일본 공사의 추천으로 정계에 복귀한다. 1905년 일왕의 특사 이토 히로부미가 경성에 도착하고 국제적으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한다는 을사늑약 체결을 위해 고종을 협박한다. 일본의 일방적인 요구를 해결하고자 고종은 어전회의를 열고 이완용이 회의를 주도한다. 끝내 반대 소식을 전해 들은 이토 히로부미는 다짜고짜 궁으로 찾아오고 고종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조약을 미루려 자리를 비운다. 하지만 오늘 조약을 체결하기로 마음먹은 이토는 주요 대신들이 모여 있던 중명전으로 향하고 대신들을 압박하여 조약 승인을 강요한다. 이때 이완용은 강력하게 조약 체결을 찬성하고 분위기에 휩쓸린 대신들은 결국 6명 중 5명이 찬성하며 조약이 체결된다. 대한제국은 결국 외교권을 박탈당하며 일본의 반식민지가 된다. 

 

이완용의 삶

을사늑약 체결을 알게 된 민중들은 을사오적을 향해 분노하고 이완용은 잠시 이웃 나라에 외교권을 맡겼을 뿐 이를 반대하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주장한다. 을사늑약 체결 직후 일본은 가장 먼저 통감부를 설치한다. 통감부의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가 되고 통감부는 이후 조선총독부의 모체가 된다. 매국노 이완용은 을사늑약 이후 새로운 내각의 총리대신으로 임명되며 경제적 이권을 챙길 수 있는 광산사무국 총재로도 임명된다. 지위와 재력을 모두 손에 쥔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어떤 난관에도 좌절하지 않고 한국을 일본에 병합시키겠다고 하며 충성을 맹세한다. 

 

1907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는데 일본의 방해로 헤이그 특사는 회의에 참석도 하지 못한다. 일본은 크게 분노하며 고종을 쫓아낼 계획을 세우고 이토는 이완용을 통해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일본 천황에게 직접 사과하라고 전한다. 무례한 일본의 요구에 고종이 반대하자 이완용은 고종을 나무랐다고 한다. 한때 고종이 총애했던 대신 이완용은 일본 편에서 고종을 위협하는 인물이 되고 1907년 6월 결국 고종은 폐위된다. 고종까지 폐위시킨 무소불위 이완용을 민중들은 개에 비유하며 그의 집 담벼락에는 욕설과 분뇨로 가득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사망하며 이토의 측근인 이완용 역시 칼에 찔린다. 이완용의 목숨을 노린 사람은 이재명 의사로 이재명 의사의 습격에 이완용은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지만 일본에 당대 최고 의료진을 지원받으며 살아남는다. 이완용은 이후 매국 행위에 더 전념한다. 1910년 8월 한일 강제 병합 조약이 체결되며, 한일 강제 병합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의 모든 일에 관한 모 통치권을 완전하고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대한제국의 통치 권한을 일본이 갖게 된다는 의미의 조약 주범은 이완용이었다. 경술년에 당한 나라의 수치라는 경술국치의 사건 이후 이완용은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이순신전 같은 위인전을 읽을 수 없도록 한다. 당시 일본은 매국인사들의 공로에 따라 작위와 돈을 내렸는데 이완용은 백작 작위와 15만 원을 받았으며 집은 3700평의 대저택이었다. 1920년 초 그의 현금 자산은 300만 원으로 현재 약 600억 원의 가치이다. 이완용은 조선 제일 현금 부자라고 불리며 토지 또한 여의도 면적의 7.7배를 소유했다. 부귀영화를 누리고 반역자의 삶을 산 이완용은 1926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그의 장례식엔 1300명의 조문객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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