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일제가 조선말을 짓밟은 역사

2023. 12. 10. 13:56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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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가르친 국어

1930년 후반 학교에서는 조선말 사용이 금지되었고 실수라도 우리말을 쓰면 벌을 받고 따귀를 맞았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후 조선의 국어는 일본어가 되었으며 조선총독부가 펴낸 국어 교과서인 국어독본에는 일본어가 적혀있었다. 이때 우리 말과 글은 국어가 아닌 한글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는다. 세종대왕 이후 훈민정음으로 불리다 일제강점기 시절 처음으로 한글이라 불리게 된다. 

말모이 : 첫 우리말 사전

한글이라 이름을 지은 사람은 국어학자 주시경으로 한글의 연구 아니라 교육을 통해 대중화에 힘쓰며 언어 독립을 꿈꿨다. 한글의 아버지인 주시경은 언제라도 우리말이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우리말 사전 제작을 계획한다. 1911년 조선어 사전 편찬을 계획한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은 사전 이름을 말모이로 정하고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시작한 지 4년 만에 주시경이 갑작스레 사망하며 작업은 기약 없이 중지된다. 일제 탄압 아래 우리 말과 글은 점점 잊히는 듯하였는데, 그로부터 15년 후 주시경 제자들이 조선어연구회라는 학술 단체를 만들어 사전 편찬 작업을 재개한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국어학자 이극로로 유학 생활 중 영국의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가 모국어인 퀼트어 대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우리 또한 일본어를 사용하며 우리말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언어 독립운동을 결심한다. 일제는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총칼로 통치하는 무단통치 시기였는데, 3.1 운동 이후에는 항일무장투쟁 단체가 아니라면 비교적 감시가 느슨하였다. 조선어연구회는 이 기회를 잡아 조선어학회로 개명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다.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과정

조선어학회는 사전 편찬 시작부터 난항을 겪는다. 사전에 기록할 단어를 정해야 하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았으며, 당시 조선은 지역마다 사투리를 써 소통이 어려울 정도였다. 학교 선생이 많았던 조선어학회는 먼저 전국 팔도의 사투리를 모으기 위해 학생들의 도움을 받는다. 방학 때 귀향하는 학생들에게 지역의 방언 수집 과제를 내어 시골말 캐기 잡책에 기록하도록 했다.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모으게 된 전국 팔도 사투리는 1만여 개. 사전에 올릴 수 있는 단어는 표준어 단 하나로 여러 사투리 중 무엇을 표준어로 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조선어학회는 단어 하나에도 고심을 기울여 표준어 선정 회의를 열고 여러 번의 큰 회의를 거쳐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행한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 최초로 전국 각지에서 제멋대로 쓰이던 우리말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작업이었다. 1936년 10월 조선어학회는 표준말 모음 발표회를 열고 이극로는 행사의 축사를 도산 안창호에게 부탁한다. 안창호의 축사가 이어지던 그 순간 일제 경찰들이 강제로 행사를 중단시킨다. 조선어를 말살하려 했던 일제의 정책에 조선어학회는 눈엣가시였고 독립운동가인 안창호의 축사와 우리말을 지켜야 한다는 축사 내용이 빌미가 되어 단순 학술단체로 여겼던 조선어학회는 일제에 감시받는다.

 

시작된 일제의 탄압, 위기의 조선어학회

발표회 사건의 책임자로 이극로는 경찰서에 불려 간다. 이극로가 일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고개 숙이며 조선어학회는 연구 단체일 뿐이라고 해명하여 다행히 조선어학회는 위기를 모면한다. 하지만 이후 일제 형사들은 조선어학회의 사무실에 매일 같이 드나들고 몇 년에 걸친 압박에 조선어학회는 억지로 참배를 올리고 친일 단체에 가입해야 했다. 오직 사전 편찬을 위해 4년여의 세월 동안 굴욕을 묵묵히 견뎌냈다. 하지만 결국 조선어학회는 일제에 꼬투리를 잡힌. 기차역에서 조선인 청년 박병엽이 일제 경찰에게 자신을 박병엽이라고 소개하여 가택수사를 당한다. 당시 조선에는 조선어 말살 정책과 강압적 창씨개명이 이뤄졌는데 박병엽이 일본어를 안 하면서 조선 이름까지 쓰자 그를 경찰서로 연행하고 가택수사를 실시하였다. 가택수사 중 경찰은 박병엽의 중학생 조카 일기장에 2년 전 '오늘 국어를 썼다가 선생님한테 단단히 꾸지람을 들었다'는 내용을 발견한다. 경찰은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국어로 생각하게 민족의식을 심어준 교사를 찾기 시작하고 조카 박영희의 동급생들까지 취조하자 결국 조선어학회 회원인 정태진의 신상이 파악된다. 정태진은 독립운동가 준하는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20여 일간 고문이 받는다. 고된 고문에 결국 정태진은 조선어학회가 독립을 원하는 민족주의 단체라고 자백하고 일제 형사들은 퇴근 시간을 노려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끌고 간다. 사전 원고와 회원들의 일기장들이 모두 압수되고, 압수한 자료에서는 후원자들의 명단까지 밝혀져 관련 인사까지 33명이 검거된다. 극심한 고문에 일부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고, 일본 형사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이들을 고문하며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재판도 받지 못한 채 2년이 지난다. 마침내 열린 재판에서 그들의 죄목은 내란죄가 된다. 폭동으로 국가의 존립과 헌법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범죄의 내란죄는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겐 지나친 죄목이었다. 이들은 모두 유죄를 받아 징역형을 선고받고 회원들은 상위법원인 경성고등법원에 재심을 신청했지만 7개월 뒤 또다시 유죄판결이 나온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절망에 빠져 살아서 나갈 수 없을 거라 체념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석방된다.

 

조선의 광복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것이다. 8월 17일 3년여의 수감 끝에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자유를 찾고 잃어버린 원고를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압수당한 원고는 찾을 수 없었고 무수한 땀과 눈물의 결과물이기에 더욱 절망스러웠던 상황. 그런데 경성역 창고에 조선말을 풀이한 원고 뭉치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적적으로 원고를 찾게 된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1심 판결은 함흥지방법원이었고 재심은 경성고등법원이라 증거물인 사전 원고가 경성으로 옮겨졌는데 갑작스러운 광복으로 급하게 떠나며 원고가 경성역 창고에 방치된 것이었다. 사전 편찬은 시작한 지 약 18년 만에 조선말 큰 사전 1권으로 출권되며 결실을 맺는다. 이는 현재 국어사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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