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6. 18:19ㆍ한국사
1636년 병자년 청나라와의 병자호란에서 조선은 패하였고, 조선의 왕인 인조는 오랑캐라 부르던 청나라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을 당한다. 인조의 첫째아들 소현세자는 조선이 패한 댓가로 청의 요구에 따라 부인과 신하, 신하의 가족들과 함께 청으로 끌려간다.
조선과 청의 관계
조선의 외교는 사대 외교였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긴다는 사대 외교를 펼치던 조선은 명나라를 섬기고 후금(청, 여진족)을 배척하는 사상이었다. 그런데 청나라가 점점 세력을 키워나가며 명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을 청의 편으로 만드려고 하자, 조선은 이를 거부하였고 청은 조선을 침략해온다(병자호란).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청나라는 조선에 1)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의 연호를 쓸 것. 2) 청의 출병 요청에 원군을 파견할 것. 3) 세자 및 다른 왕자와 대신들의 아들 또는 아우를 인질로 보낼 것. 을 요구한다. 그렇게 당시 조선의 왕세자였던 소현세자는 부인과 대신들, 그리고 대신들의 가족까지 약 500명과 함께 청나라로 떠나게 된다. 소현세자는 차기 왕의 후보로써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물이었다.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후 자신이 아버지를 대신해 청나라 황제 앞에 서겠다고 할 정도로 효심이 깊었으며, 백성을 헤아리는 마음과 훌륭한 인품으로 대신들 사이에 호평이 자자했다. 청으로 떠나는 날, 두 살 배기 아들을 조선에 두고 떠나며 통곡하는 신하들을 달래고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 인조를 뒤로 의연하게 떠났다고 한다.
청나라의 수도 심양에 도착한 소현세자 일행은 청의 황궁 근처인 심양관에서 지내게된다. 황궁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심양관은 청의 왕실이 소현세자 일행을 감시하기 위한 마치 창살 없는 감옥이었고, 500명이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좁은 공간이라 더운 여름철에는 습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에 병든 이가 속출하였다. 청나라로 끌려간 소현세자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청의 왕실은 소현세자를 의미 없이 이리저리 불러내며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사냥이나 연회, 제사, 행사마다 불러내며 정기적으로 황제에게 문안 인사도 올릴 것을 요구했다. 또한 명나라를 공격하는 전쟁에 소현세자를 직접 출전시켜 목숨을 위협하거나, 명을 공격하기 위한 군사물자를 조선에서 받아오라고 요구하는 등 한 나라의 왕세자로서 존중하지 않는 푸대접을 행하였다. 청나라에게 소현세자는 말그대로 전쟁 승리의 전리품이었다. 대외적으로 소현세자를 앞세워 그들이 한 나라의 왕세자를 부린다는 힘을 과시하길 원한 것이다.
청나라에는 조선인 포로를 거래하는 속환 시장이 있었다. 소현세자 일행 외에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은 약 50만명이 넘었다. 헤어진 가족이나 친구를 만날까 조선인들은 속환 시장에 모여들었고, 늘 조선인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한 속환 시장을 보며 소현세자는 이들을 조선으로 보내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소현세자는 직접 자신의 돈을 내고 포로를 사들였다. 소현세자 역시 심양관 생활 동안 자금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여유가 되는대로 조선인 포로들을 사들였다. 하지만 속환비는 점점 상승하고, 조선의 조정 또한 이를 알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상승하는 속환비에 점점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청나라 황제의 동생인 팔 왕이 소현세자에게 거액을 주고 자신이 갖고 싶던 조선의 물건을 구해달라 요청한다. 소현세자의 아내 세자빈 강 씨는 물자가 부족한 청나라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결심한다.
왕세자부부 장사를 시작하다
조선에서 장사는 평민들이나 하는 일이라 왕세자, 왕세자빈이 장사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사가 달려있는 문제였고, 청의 조선인들이 마음에 쓰였던 소현세자 부부는 청나라 왕조를 대상으로 인기가 많은 조선의 담배, 표범 가죽, 모피, 과일들을 팔기 시작했다. 장사는 성공적이었고 소현세자 부부는 점점 돈을 벌기 시작하며 생활에 안정을 찾아간다. 그런데 점차 자리잡아 가던 소현세자부부에게 청나라는 심양관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아라는 통보를 받는다. 제공하던 곡식을 더이상 제공하지 않을 것이니 직접 생계를 책임지라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였다. 심지어 청나라가 준 땅은 농사가 힘든 척박한 땅이었다. 하지만 세자빈 강 씨는 속환 시장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조선인 포로들을 동원하여 체계적으로 농사를 시작하였다. 강 씨는 농부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일종의 성과금처럼 수확량에 따라 차등 보상을 지급하였다. 강 씨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첫 해 농사에서 3,300석이 넘는 양을 수확하며 500여 명이 약 1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을 얻었고, 그다음 해에는 첫 해의 2배 수익을 낸다. 500명이 배불리 먹고도 곡식이 남을 정도로 농사에 성공하자, 남은 곡식은 심양관 앞에서 청나라인들에게 팔며 돈을 벌었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은 조선인 속환에 쓰였는데 소현세자 부부가 구한 포로만 수백 명이라고 한다.
마침내 조선으로 돌아오다
그러던 1644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무너뜨리며 중국을 통일한다. 조선이 사대했던 명나라의 몰락을 목격한 소현세자는 청에 지내면서도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었는데, 청나라로 수입된 서양 문물을 접하고 급변하는 정세를 몸소 체험하며 낙담보다는 여러 생각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렇게 청의 심양관을 떠나 자금성으로 거처를 옮긴 후, 청은 소현세자를 조선에 돌아가라고 한다. 명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볼모로 삼았던 소현세자를 명이 멸망 후 더이상 인질로 붙잡아 둘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게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지 9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이야기는 금의환향일 줄 알았던 소현세자는 뜻밖에도 조선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애틋했던 아버지 인조는 돌아온 소현세자를 왕위를 두고 견제하며 냉대하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 타국에 있다가 조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학질(말라리아)이라고 진단을 받고 3일 뒤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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