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9. 15:24ㆍ한국사
1945년 8월 15일. 경성에서는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의 손자, 의친왕의 장남 이우의 장례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우는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군으로 복무하고 있었는데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핵폭탄 폭발에 휘말려 34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러나 8월 15일 12시에 진행되기로 한 이우 왕자의 장례식은 갑자기 연기된다. 일본이 12시에 중대 발표를 하겠다고 긴급 속보를 내렸기 때문이다. 긴급 속보는 일본이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토록 바랬던 광복의 순간, 환호로 가득 찰 거 같았던 경성의 거리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라디오로 전해진 일본의 항복선언이 일본 왕실에서 사용하는 어려운 어휘와 안 좋은 음질로 조선인들이 이를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 해방 그 이후
해방된 이후 조선인들의 보복이 두려웠던 조선총독부는 무사 귀환의 도움을 청하려 일본 정부에 연락한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도움은커녕 이들에게 항복 소식조차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 비공식 루트로 패전 소식을 알게 된 조선총독부는 결국 조선의 독립운동가를 찾아간다. 자신들을 향한 조선인들의 분노를 통제해 줄 정신적 지주를 찾아 안전을 부탁하려는 의도였다. 조선총독부는 독립운동가 중 국내에서 활동하며 조선인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여운형을 찾아간다.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에게 일본인과 일본군들이 조선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도록 치안 협조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갑작스러운 광복으로 유혈 사태만큼은 피하려고 한 여운형은 이를 수락하고 이들에게 5가지를 조건을 요구한다. 1) 정치범과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정치범, 경제범은 일제에 저항한 사람들을 뜻함). 2) 3개월간의 식량을 보장할 것 3) 치안 유지와 건국을 위한 정치 활동에 절대 간섭하지 말 것 4) 청년과 학생을 조직 훈련하는데 간섭하지 말 것 5) 근로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데 간섭하지 말 것 즉, 조선의 건국을 위한 활동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역시 이를 수락하고 8월 15일 저녁 6시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한다.
8월 16일. 조선인들은 서대문 형무소 앞에 억울하게 수감된 가족과 친구들을 맞이하기 위해 모인다. 열릴 것 같지 않던 형무소의 철문이 드디어 열리고 조선인들은 함께 만세를 외치며 광화문으로 나아간다. 총독부의 기능이 마비가 된 후인 8월 16일, 처음으로 조선인의,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방송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조선총독부와 일본 관청들은 그동안의 일제 만행이 담긴 기밀문서를 소각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줄을 지어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돈을 끊임없이 찍어내었으며, 이때 발행한 금액은 36억 8천만 엔으로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인 23억 5천8백만 엔보다 큰돈이었다.
광복 3일째인 8월 17일. 매일신보의 1면에는 '경거망동을 삼가라'라는 기사가 발행된다. 일본군이 기쁨에 취한 조선인들을 향해 경고 메시지를 날렸다. '시위운동 일체 불허, 민중들은 절대 자중하라, 인심 착란 치안방해는 단호 조처'의 내용은 조선인들의 만세 시위를 금지하며 협박한 것이다. 조선의 식민 지배는 일본군과 조선총독부 두 축으로 운영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에게 접근하여 합의하였지만, 일본군은 이를 알지 못했고 군과 상의 없이 일을 벌인 것 화가 나 일본의 항복 대상은 연합국이지 조선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며 다시 조선인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완전 무장한 일본군은 다시 언론기관을 장악하며 통제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경고 수위를 높이며 종로 일대에 기관총까지 설치한다. 해방의 기쁨을 누리던 광복 며칠 만에 조선인은 일본군에게 다시 경성을 뺏기고 만다. 패전국인 일본에는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는데, 일본군은 협정 위반을 피하면서 조선인을 억압할 방법으로 헌병을 동원했다. 일본 헌병은 경찰처럼 치안 업무권을 보유했는데 조선인에 대한 억압을 경찰 업무 수행이라며 변명하려는 꼼수였다.
1945년 8월 24일에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던 우키시마호가 일본 부근 해상에서 폭발하며 가라앉았다. 일본에 끌려가 노역에 시달린 조선인들이 조국의 광복으로 돌아오던 배편이 폭발로 모두 바다에 가라앉은 것이다. 당시 승선 인원은 규정의 2배가 넘는 인원이 타 있었는데, 모두 하루라도 빨리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조선인들이었을 것이다. 사고의 원인으로 일본은 미국이 뿌려놓은 기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기뢰 때문이라면 선체 외부에서 내부로 구멍이 뚫려야 하는데 우키시마호에 난 구멍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뚫려있었다. 수많은 조선인이 명확하게 이유도 밝히지 못하고 조국으로 돌아오던 중 사망한다. 일본은 침몰 후 9년 만에 우키시마호를 인양했는데 1950년 1953년까지 벌어진 6.25 전쟁에 피폐해진 한국에 철을 팔기 위해서였다. 수장된 조선인들의 유골 수습이 아닌 고철을 팔기 위한 목적이다.
하지만 일본군의 억압은 오래갈 수 없었고 패전국으로서 연합국에 조선의 통치권을 넘겨야 했다. 일본 다음으로 조선에 주둔할 연합국은 미국과 소련이었다. 1945년 8월 11일 미국은 소련에 한반도의 절반인 38도선을 경계로 소련과 미국이 분할 점령할 것을 제안한다. 전 세계적으로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으로 나뉜 상황에서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끝낼 무렵 소련은 이미 한반도의 반을 차지한 후였다. 조선 전체가 공산국가가 되는 것이 두려웠던 미국은 한반도 전체 공산화를 막으려 38선을 그은 것이다. 소련은 분할 점령에 동의하였지만, 미국은 소련이 남하할 것을 걱정했고,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미군을 조선으로 보내기로 결심한다. 조선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미국은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던 중 일본이 미국에 혹할만한 정보를 제공한다. 일본은 미국에 조선인 중에는 공산주의 혹은 독립운동자가 있는데 이 기회를 통해 치안을 어지럽히려 하는 자가 있다며 조선의 불안정한 실정을 거짓 보고 하고, 이를 들은 미군은 일본군에게 미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일본이 조선 식민 통치를 유지하라는 내용을 전한다. 일본은 이를 통해 조선을 억압할 명분을 얻게 된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항에 들어온 날,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조선 사람들이 모인다. 미군을 환영하는 인파 속으로 일본 경찰이 조선인들을 향해 총을 쏜다. 조선인이 일본 군경이 정한 경계선을 넘었다는 이유였다. 미국은 이런 일본의 행동을 두둔한다. 미국은 일본 경찰이 대규모 시위를 효과적으로 막았다고 평하였는데 일본의 거짓 정보에 미국이 완전히 속은 것이다. 미군의 등장으로 일본이 쫓겨날 것이라고 생각한 조선의 기대와는 너무 다른 현실이었다. 죄 없는 조선인 2명의 사망자와 14명의 부상자를 낳은 비극이었지만 일본은 만행을 저지르고도 어떠한 대가도 치르지 않았다.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일본의 항복 조인식에서 일본과 연합국이 합의한 내용에 서명하며 미군의 조선 주둔을 공식화한다. 항복 조인식 후 열린 국기 교대식에서 드디어 일장기가 내려간다. 하지만 일장기가 내려오자마자 성조기가 양된다. 일장기 대신 계양된 국기는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 조선인들에게 9월 8일부터 새롭게 미군정이 시작된다. 일본군과 일본인은 이후 조선을 무사히 떠난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패전국의 무사 귀환이다.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의 의순공주 오랑캐의 아내가 되다 (0) | 2023.11.24 |
---|---|
킹메이커 한명회, 조선의 왕을 바꾸다 (0) | 2023.11.19 |
소현세자, 조국에 환영받지 못하다 (1) | 2023.10.06 |
이방원은 왜 어머니의 무덤을 파헤쳤을까 (0) | 2023.09.19 |
고려 역사 세계최강 몽골에 맞선 고려인 (1) | 2023.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