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19. 21:56ㆍ한국사
한명회는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지략과 처세술, 실행력만큼은 뛰어난 인물이었다. 몇 번의 시도에도 한명회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지만, 음서라는 제도로 38살 늦은 나이에 관직에 오른다. 명문가 집안의 배경으로 경덕궁 궁지기 종 9품 관리직에 오른 한명회는 낮은 직급으로 사람들에게 무시당했다. 그런데 어느 날 단종의 삼촌인 수양대군이 그를 찾아온다.
*음서 :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의 자식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제도
수양대군은 왜 한명회를 찾아갔을까?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당시 왕인 단종의 삼촌이었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학문에 뛰어났던 수양대군은 욕망과 정치적 야심이 큰 인물이었다. 대신들은 어린 나이에 즉위한 단종에게 위협이 될 세력을 축소하려 하였고, 수양대군은 자신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한명회를 찾아간다.
수양대군을 견제하는데 중심이 된 인물은 좌의정 김종서이다. 태종부터 단종까지 4명의 임금을 모신 김종서는 조선 전기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문신이었다. 단종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김종서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다. 김종서는 황표정사를 통해 왕의 고유 권력인 인사권까지 쥐었으며,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손을 잡아 수양대군을 권력에서 완전히 밀어내려고 한다. 위기감을 느낀 수양대군은 자신을 도와줄 책사로 한명회를 선택했다.
*황표정사 : 대신들이 후보자 이름 위에 황표를 붙이면 왕이 그대로 낙점하는 인사 형태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종실의 후손으로서 사직을 위하여 난적을 토벌하는 것이니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여 절대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라고 하며 자칫 역모로 몰릴 수 있는 발언을 다시없을 기회에 승부수로 던진다. 수양대군은 역모를 일으킬 생각은 있었지만,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명회의 대답으로 확신을 얻고 그렇게 더 높은 관직을 꿈꾸는 한명회와 조정을 손에 얻으려는 수양대군이 함께 거사를 준비한다.
책사 한명회, 거사를 설계하다
수양대군과 한명회의 목표는 김종서를 처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첫 번째 전략은 무사와의 결탁이다. 훗날 거사를 위해 병력 모집이 시급하였지만, 김종서 세력의 압박 속에서 병사를 모으는 것은 역모로 찍힐 게 뻔하였다. 한명회는 무사를 모을 방법으로 수양대군에게 무사들을 위한 연회를 열어 대접하게 하였고, 수양대군은 활쏘기 연습을 핑계로 무사들을 모아 술과 안주를 대접하며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또한 한명회는 한양 도성의 야간 순찰을 담당하던 홍달손을 포섭하며 거사에 성공하기 위해 책사로서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수양대군의 거사 시작, 계유정난
홍달손이 도성 출입을 감독하던 날,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집을 찾아간다. 김종서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수양대군을 방으로 들이려는데 수양대군은 먼저 편지를 읽어달라며 건넨다. 김종서가 편지를 받아 들자 수양대군의 신호를 받은 한 시종이 김종서를 철퇴로 내려친다. 김종서를 쓰러트린 후 수양대군은 단종을 찾아간다.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김종서와 안평대군이 작당하여 전하를 해하려 했다며 단종에게 거짓말을 하고,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살려달라고 빈다. 한명회는 왕명을 빌어 대신들을 궁으로 불러낸 후 살생부를 통해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편에 선 대신들을 한 명씩 없앤다. 이 사건은 1453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의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이다. 계유정난 이후 권력은 수양대군에게 넘어가고 수양대군은 43명을 공신으로 책봉한다. 말단 궁지기에 불과했던 한명회는 계유정난 1등 공신이 되었고, 수양대군은 계유정난 2년 후 왕위에 오른다.
권력을 위해 어린 조카인 단종의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세조(수양대군), 조정의 몇 신하들은 정당한 권력으로 세조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단종 복위를 위해 명나라 사신을 만나는 자리에서 세조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한명회는 연회의 호위무사 중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한 무사가 있는 것을 알고 수양대군에게 칼을 찬 호위병은 들이지 말라고 한다. 결국 세조의 암살에 실패한 단종 세력은 동료 중 한 명의 배신으로 암살 계획이 들통나고 세조는 이들을 잔인한 형으로 처벌한다. 수양대군은 단종 복위 운동의 재발을 막기 위해 단종을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내고, 단종은 타지에서 17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이후로도 찬탈한 권력이라며 끊임없이 세조를 반대하는 세력에 정권이 불안해지자, 세조는 한명회를 도체찰사로 파견한다.
*도체찰사 : 조선 시대에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 관련 업무를 총괄하던 최고 관직
한명회는 세조의 굳건한 신임으로 14번의 도체찰사를 지냈다. 세조는 '경의 이목이 곧 나의 이목이라.'라고 할 정도로 한명회를 신뢰했고 한명회는 1462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까지 오른다. 경복궁 궁지기에서 14년 만에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한명회는 멈추지 않는다. 그는 더 많은 권력을 얻기 위해 세조와 사돈을 맺는다.
한명회의 위기?
1468년 한명회의 든든한 배후이던 세조가 병세가 악화하여 사망한다.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이 즉위하고 그렇게 한명회의 시대는 끝나는가 싶었으나, 이제 왕의 장인으로 다시 한번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런데 사위인 예종이 즉위 15개월 만에 사망하고 조정이 혼란에 빠지자, 한명회는 다시 한번 왕을 만드는 데 힘을 쏟는다. 예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종은 예종과 마찬가지로 한명회의 사위였다. 한명회는 셋째 딸은 예종, 넷째 딸은 성종과 혼인시키며 3대에 걸쳐 왕위를 만들어 낸 킹메이커가 된다. 13세에 임금이 되었던 성종이 성년이 되자 정희왕후(세조의 왕비)는 수렴청정 중단을 선언한다. 하지만 한명회는 성종에 의해 자신의 권력이 약해질 것을 염려하여 이를 반대한다. 수렴청정은 오롯이 정희왕후의 결정권이었는데 왕의 장인이라 할지라도 한명회가 선을 넘어버렸다. 성종은 이에 분노하고 신하들은 한명회의 처벌을 요구한다. 거세지는 대신들의 반발에 한명회는 성종을 찾아가 자신의 직위를 해임해 달라고 직접 청하며 스스로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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