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은 왜 죽음을 생각했을까

2023. 11. 26. 09:30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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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초상화_ 출처 : 나무위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부산 앞바다로 침입한 일본군은 조선의 지방성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20일 만에 조선의 수도 한성이 함락된다. 하지만 바다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의 수군이 연전연승 중이었다. 조선 수군의 승리로 일본의 침략 계획은 차질이 생기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급히 정예부대를 남해로 파견한다. 1592년 7월 왜선 70여 척이 조선의 견내량에 모여든다. 견내량은 장소가 협소하고 암초가 많아 전투 중 배끼리 충돌할 위험이 컸다. 이순신은 미끼 조를 견내량에 투입해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적을 유인하는 전략을 펼치고 한산도 앞바다에 들어선 일본 함대 앞에 학익진을 펼친다. 73척 중 59척이 격침되고 왜군 총 100선을 3일 만에 침몰시키며 이순신은 대승을 이뤄낸다. 한산대첩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에게 이순신을 바다에서 만나면 피하라고 명령하며 사실상 해전 금지령을 내린다. 이순신은 한산대첩의 공으로 전라 충청 경상 삼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임진왜란 : 1592~1598년까지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 2차에 걸쳐 싸운 전쟁

 

이순신 의금부로 잡혀가다

일본의 해전 금지령으로 일본과의 휴전이 길어지니, 선조는 이순신이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이제는 작은 적이라도 잡는데 성실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지 않는다며 의심한다. 이순신은 일방적으로 회피하는 적과 싸울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선조에게 전쟁 상황에 대해 정확히 보고했으나 선조는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순신이 게을러졌고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있다고 생각하던 선조. 그런데 1597년 조선 조정에 첩보가 들어온다. 당시 일본군을 이끌던 두 장수는 앙숙 관계였는데 이 중 한 사람인 고니시가 '가토가 군대를 끌고 바다에 나갈 예정이니 그때 공격하라'라며 정보를 흘린다. 정보의 진위를 두고 고민에 빠진 조선은 가토와 고니시의 관계를 알고 고니시의 정보를 사실이라 판단한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출전 명령을 내리며 조선 바다로 오는 가토를 물리치라고 한다. 하지만 이순신은 왕명을 무시한 채 출전하지 않는다. 이순신은 적에게서 나온 정보를 믿을 수 없었고, 섣부른 출전은 오히려 조선군에 위험할 거라 판단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판단 아래 출전을 고민했지만, 왕명을 받지 않는 이순신에 선조는 분노한다. 이순신 또한 왕명을 어겨 파직될 것이란 걸 예상하며 뒤늦게 출전을 결정했으나, 선조는 이미 이순신에게 체포 명령을 내렸고 선조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죄인이 된 이순신은 한성의 의금부로 압송된다. 

 

의금부에서 모진 고문을 받던 이순신의 나이는 53세였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죄인이 된 이순신은 투옥된 지 28일 만에 감옥에서 풀려난다. 구사일생으로 사형은 면한 이순신은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없었다. 사형을 면했을 뿐 여전히 중죄인이었던 이순신에게 선조가 내린 처벌은 백의종군이었다. 흰옷을 입고 군사를 따라간다는 뜻의 백의종군은 지금의 보직해임과 유사한 뜻으로, 다른 장군을 보좌하거나 공을 세워 만회하도록 한 처벌이다. 이순신은 여전히 군인이지만 직책을 모두 잃은 것이다. 백의종군을 위해 떠나야 할 곳은 경상남도 합천의 초계였다. 이순신은 합천 초계로 향하던 중 어머님의 부고를 듣게 된다. 옥중의 아들이 걱정돼 여든셋의 나이로 한성에 향하던 이순신의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신 것이다. 하지만 죄인 이순신에게 어머니의 장례는 허락되지 않았으며, 어머니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는 괴로운 상황에 이순신은 죽음까지 생각했다. 

 

이순신의 또 다른 시련

1597년 7월 이순신에게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조선 수군이 모두 궤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원균은 이순신보다 5살 많은 10년 먼저 급제한 이순신의 대선배였다. 원균은 이순신이 임진왜란에서 활약하며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하자 후배가 상사가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주변에 이순신을 모함하기 시작한다. 결국 선조와의 갈등으로 이순신이 쫓겨나자,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이 차지하게 된다. 선조는 새로운 수군 지휘관에게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라 명령하고 원균은 판옥선 160여 척을 모두 이끌고 부산으로 간다. 하지만 원균은 일본에 대패한다. 조선 수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인 칠천량 해전이다. 60여 척의 판옥선은 물론 수군들까지 잃게 된 참패로 결국 일본에 해상 진출로를 내주게 된다. 칠천량의 참패로 조선 수군은 사실상 전멸하고 일본군은 손쉽게 상륙해 한성으로 진군한다. 칠천량의 패전 이후 선조는 이순신에게 교서를 보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할 것을 부탁하고 이순신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칠천량 해전 후 조선 수군의 병력은 군관 9명과 병사 6명이 전부였다. 병력은 물론 배 한 척 없는 상황에 놓인 이순신은 직접 백성들을 설득해 수군을 모으기 시작한다. 다행스럽게 칠천량 해전에서 도망친 12척의 배가 돌아오고 이순신의 복직 소식에 도망친 장수들까지 합류한다. 

 

1597년 9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전라남도 진도 벽파진에 자리 잡고 일본 수군은 어란포에 들어와 있다고 전해 듣는다. 당시 왜선의 규모는 300여 척. 반면 조선 수군의 배는 총 13척. 불리한 전세에 조선의 병사들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순신은 벽파진에 꾸렸던 진영을 해남의 울돌목에 배치하며 폭이 비좁아 급격히 물살이 거세지고, 암초에 부딪힌 물살이 회오리치는 현상을 이용해 이순신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적선을 차례차례 격퇴하려는 전략을 세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상황. 왜선들은 명량으로 하나씩 들어오고 왜선 133대와 조선 수군 13척의 싸움이 시작된다. 이순신은 모든 함선 출정을 명하며 이순신의 대장선이 선두로 나간다. 그런데 이순신을 뒤따라야 할 아군의 배들이 한 척도 따라 나오지 않는다. 400미터 넘게 멀어진 대장선과 12척의 배. 칠천량 대패 이후 조선 수군의 기세는 밀려있었다. 결국 이순신은 대장선은 일본을 상대로 한 시간 동안 홀로 싸운다. 이순신은 대장선 장수들과 고군분투하지만 접근해 오는 일본군과 백병전까지 치른다. 홀로 분투하는 대장선을 보고도 후방의 조선 배가 움직이지 않자, 이순신의 외침에 두 척의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른 배들도 뒤따르며 그제야 조선 수군이 모두 뭉친다. 오후 1시경, 전투의 흐름이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갑자기 물살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여 일본 함대가 역류를 타 조선 수군에 반대 방향으로 밀려난다. 조선 수군은 물살을 타 일본 함선으로 향하며 포화를 쏟아붓는다. 거센 물살과 포화에 일본 함선들은 차례로 침몰하고 기적적인 승리를 이뤄낸다. 명량해전은 우리 역사는 물론 세계 해전사에도 보기 드문 해전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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