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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왜 며느리 넷을 쫓아냈을까
세종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 문종은 공부부터 예체능까지 못 하는 게 없었다. 적장자로 태어난 귀한 왕세자인 문종의 아버지 세종은 문종의 세자빈을 무려 3년간 골랐다고 한다. 문종의 결혼은 조선 건국 이래 첫 적장자를 통한 왕위 계승이자, 정통 왕위 계승으로 유교적 가치를 실현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문종의 첫 세자빈은 당시 군대 최고 지휘관 정3품 상호군인 김오문의 딸이 되었다. 세자빈의 휘빈이란 호를 받아 세종의 첫 번째 며느리가 된 휘빈 김 씨. 하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2년여 만에 파탄 난다. 결혼 당시 문종은 14세였는데 세자는 15세 봄부터 합방이 가능하였다. 결혼 직후 1년 동안 부부생활은 물론 문종은 휘빈 김 씨를 좋아하지 않아 오히려 궁녀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그렇게 1년 뒤 문종..
2023.08.02 -
임진왜란 역사 한국의 도자기를 노린 일본
1592년 비 내리는 새벽, 경복궁을 빠져나가는 가마 행렬에 조선의 14대 왕 선조가 타고 있었다. 일본은 명나라 정벌을 위해 조선에 길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고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침공하였다(임진왜란). 90여 척의 배로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단 17일 만에 조선 지방의 성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한양의 코앞까지 들어온다. 선조는 평양성에서 국경까지 쫒기다 결국 명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고 조·명 연합군에 일본군은 경남 해안까지 퇴각하지만 밀려난 곳에서 버틴다. 일본은 조선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명나라에 협상을 요구하는데, 그 협상 조건은 첫 번째, 명나라 황녀를 일왕의 후궁으로 줄 것 두 번째, 조선 8도의 절반인 4도를 일본에 줄 것 등이 있었다. 무리한 요구에 4년간의 논의에도 협의가 되지 않자 159..
2023.07.13 -
의자왕과 김춘추 백제 신라의 역사
660년 7월, 700년의 백제 왕조가 멸망하였다.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은 여인에 빠져 삼천명의 궁녀를 거느리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의 멸망을 부른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와전된 기록이라고 한다. 사실 백제에는 삼천 명이나 되는 궁녀가 없었다. 7세기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 거주했던 인구는 약 5~6만 명. 전체 인구 중 1/20에 해당하는 삼천 명이 궁녀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마 삼천이라는 숫자는 단지 많다는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 의자왕은 옳을 의, 사랑 자로 의롭고 자비로운 왕이란 뜻이다. 왕은 본래 본명과 후대에 불리는 시호가 다른데 의자왕은 본명이 의자이다. 의자왕이 백제의 마지막 왕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 후 이름을 지어줄 신하가 없어 본명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의..
2023.07.10 -
조선사절단 러시아로 향한 이유
1896년 2월 11일, 조선의 왕인 고종과 왕세자는 일본군을 피해 러시아 공관으로 향한다. 왜 그들은 조국인 조선 땅을 벗어나 러시아로 향해야 했을까? *아관파천 :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세자가 일본군의 위협을 피해 1년 넘게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간 사건 *파천 : 왕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일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이유 1894년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쟁이 발발한다. 이 청일전쟁의 승자가 된 일본은 1894년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고 청일전쟁 이후에는 조선의 내정까지 간섭하며 영향력을 뻗친다. 일본의 극심한 내정 간섭으로 고종의 숨통이 조여가던 그때, 경복궁에서는 명성황후가 시해당한다. 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여야 했을까?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을 ..
2023.07.10 -
뺨 한대로 시작한 쿠데타, 무신정변
벌거벗은 한국사 6화에는 고려시대 무신정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기준이 1592년 임진왜란이라면 고려는 1170년 무신정변이다. 무신정변의 '정변'이란 지배층의 정치 변동이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일어난 사건을 뜻하는데 왜 고려시대 무신들은 정변을 일으켰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이라는 개념은 고려 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양반은 무반과 문반을 합친 단어로 무반은 지금의 군인·경찰, 문반은 공무원, 법관, 국회의원 정도라 볼 수 있겠다. 고려 초기만 해도 무반과 문반을 정확히 구분하지 않았는데 사회가 발전하면서 분업이 중요성이 대두되자 나라의 정치를 맡는 문신과 군사를 이끄는 무신으로 나뉜 것이다. 양반의 서열은 정1품에서 종9품으로 구분하였는데 문신과 무신이 올라..
2023.06.26 -
조선의 수재는 왜 성균관에 모였나
성균관은 成 이룰 성, 均 고를 균, 館 집 관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하는 기관이란 뜻이다. 조선의 내로라하는 수재들 대부분이 성균관 출신이며, 이황은 성균관의 대사성(총장)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렇다면 성균관에서는 무엇을 배웠을까? 조선의 수재들은 성균관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성균관은 유학을 가르치는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유학의 상징인 공자의 사상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교육기관인 동시에 제사를 지냈던 사당이다. *공자 : 세계 4대 성인이자 유교의 창시자로 인과 예를 강조. 왕세자입학도는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식 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비록 왕세자의 모습을 그릴 수 없어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스승은 책상 위에 책을 놓고 왕..
2023.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