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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었다
사도 세자의 탄생 1762년 사도세자의 탄생은 영조의 큰 기쁨이었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42세의 늦은 나이로 얻은 늦둥이 아들이다. 영조는 25살에 효장세자를 얻었는데 효장세자가 10살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계자가 중요한 왕실에서 첫아들을 잃은 슬픔과 후계자가 없어 초조했던 영조에게 효장세자 이후 7년 만에 얻은 아들이었다. 사도세자의 탄생은 영조뿐 아니라 조선의 기쁨이 되었고, 사도세자는 돌이 막 지났을 무렵 조선 역대 최연소의 세자로 책봉이 된다. 사도는 3세 때부터 왕세자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그의 총명함과 영특함에 영조와 신하들은 한없이 기뻤다고 한다. 사도의 타고남도 있겠지만, 영조는 늦둥이 아들 육성에 총력을 다했다고 전해진다. 영조가 사도의 조기교육에 집착한 이유는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
2023.09.16 -
환관 조선 천민의 신분상승 방법
환관은 왕실의 수족으로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중심이었다. 환관은 왕의 측근으로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누렸는데, 이런 환관이 되기까지 견뎌야 하는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양반부터 천민까지 환관이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서의 환관 벼슬을 하는 관리라는 뜻의 환관은 남성성을 상실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조선의 환관은 '내시'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었는데, 고려 시대의 환관과 내시는 의미가 달랐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동일해진다. 조선 시대의 환관은 왕실 사람의 시중을 들거나, 왕과 신하 사이에서 나랏일을 수행했다. 노비와 신하들이 있음에도 환관이 필요했던 이유는 왕의 여자들 때문이었다. 왕비와 후궁 외에도 궁궐 내에는 궁녀인 여자들이 많았기에 남성성을 잃..
2023.08.03 -
세종대왕은 왜 며느리 넷을 쫓아냈을까
세종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 문종은 공부부터 예체능까지 못 하는 게 없었다. 적장자로 태어난 귀한 왕세자인 문종의 아버지 세종은 문종의 세자빈을 무려 3년간 골랐다고 한다. 문종의 결혼은 조선 건국 이래 첫 적장자를 통한 왕위 계승이자, 정통 왕위 계승으로 유교적 가치를 실현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문종의 첫 세자빈은 당시 군대 최고 지휘관 정3품 상호군인 김오문의 딸이 되었다. 세자빈의 휘빈이란 호를 받아 세종의 첫 번째 며느리가 된 휘빈 김 씨. 하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2년여 만에 파탄 난다. 결혼 당시 문종은 14세였는데 세자는 15세 봄부터 합방이 가능하였다. 결혼 직후 1년 동안 부부생활은 물론 문종은 휘빈 김 씨를 좋아하지 않아 오히려 궁녀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그렇게 1년 뒤 문종..
2023.08.02 -
임진왜란 역사 한국의 도자기를 노린 일본
1592년 비 내리는 새벽, 경복궁을 빠져나가는 가마 행렬에 조선의 14대 왕 선조가 타고 있었다. 일본은 명나라 정벌을 위해 조선에 길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고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침공하였다(임진왜란). 90여 척의 배로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단 17일 만에 조선 지방의 성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한양의 코앞까지 들어온다. 선조는 평양성에서 국경까지 쫒기다 결국 명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고 조·명 연합군에 일본군은 경남 해안까지 퇴각하지만 밀려난 곳에서 버틴다. 일본은 조선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명나라에 협상을 요구하는데, 그 협상 조건은 첫 번째, 명나라 황녀를 일왕의 후궁으로 줄 것 두 번째, 조선 8도의 절반인 4도를 일본에 줄 것 등이 있었다. 무리한 요구에 4년간의 논의에도 협의가 되지 않자 159..
2023.07.13 -
의자왕과 김춘추 백제 신라의 역사
660년 7월, 700년의 백제 왕조가 멸망하였다.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은 여인에 빠져 삼천명의 궁녀를 거느리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의 멸망을 부른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와전된 기록이라고 한다. 사실 백제에는 삼천 명이나 되는 궁녀가 없었다. 7세기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 거주했던 인구는 약 5~6만 명. 전체 인구 중 1/20에 해당하는 삼천 명이 궁녀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마 삼천이라는 숫자는 단지 많다는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 의자왕은 옳을 의, 사랑 자로 의롭고 자비로운 왕이란 뜻이다. 왕은 본래 본명과 후대에 불리는 시호가 다른데 의자왕은 본명이 의자이다. 의자왕이 백제의 마지막 왕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 후 이름을 지어줄 신하가 없어 본명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의..
2023.07.10 -
조선사절단 러시아로 향한 이유
1896년 2월 11일, 조선의 왕인 고종과 왕세자는 일본군을 피해 러시아 공관으로 향한다. 왜 그들은 조국인 조선 땅을 벗어나 러시아로 향해야 했을까? *아관파천 :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세자가 일본군의 위협을 피해 1년 넘게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간 사건 *파천 : 왕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일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이유 1894년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쟁이 발발한다. 이 청일전쟁의 승자가 된 일본은 1894년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고 청일전쟁 이후에는 조선의 내정까지 간섭하며 영향력을 뻗친다. 일본의 극심한 내정 간섭으로 고종의 숨통이 조여가던 그때, 경복궁에서는 명성황후가 시해당한다. 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여야 했을까?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을 ..
2023.07.10